5. 나를 위한 세레나데

쫌쫌따리 생산일지: Serenade for Myself

by 정우안


여상한 반응에 심상찮은 반응을 했다. 2022년 여름, 커플 집단 상담 중 내가 운동이며 글쓰기 루틴을 지키며 나를 다지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런 나의 노력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일기장과 여러 기록을 뒤져도 뭐라 말했는지 적어둔 것이 없어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이 욕이나 폄하가 아니고 아주 일상적인 어휘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다른 사람과 남편은 모두 갑자기 눈물을 쏟는 나를 보며 몹시 당황했으니. 남편이 내게 중요한 사안에 무심하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무시당했다는 서러움에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상담 끝에 상담사는 내게 따로 말했다. 남편 반응에 왜 그렇게까지 흔들리는지 생각해 볼 문제라고.


일기장과 모닝페이지에 언제나 나를 설명하는데 지친다고 적었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쓴 일기와 모닝페이지를 보면 나는 나의 감정, 상황, 생각을 설명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아 분노하고 서러워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라는 문장은 5년에 걸쳐 끊임없이 등장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거라는 냉소로 기대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몇 주 후 나는 또다시 타인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하기를 반복했다. 그것들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온전한 수용과 완전한 안정을 갈구하다 얻지 못하면 분노했다가 무기력해지는 끝없는 순환이 보인다.


회사에 나와 아주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기준 이하이며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주 분노했다. 그러나 내가 경멸하는 만큼이나 인정받고 싶었기에 회사에서 나는 소처럼 일했다. 하던 대로 일하기보다 효율적인 방식을 새롭게 만드는 편이었고 그래서 인정받았다. 내 경멸의 대상과 인정을 주는 이들은 결국 같은 사람들이기에 나는 인정을 갈구한 만큼이나 강하게 그 인정을 부정했다. 자기 일을 덜어주고 일감을 밀어주기 위한 꼴사나운 전략이라고. 회사는 내게 부당함과 분노를 위한 공간이었다.


남일이라면 뭐 저런 바보가 다 있냐 비웃었다. 남일이면 쉽게 보이는 지점이 내 일이면 왜 이렇게 잘 보이지 않을까. 판단의 기준점을 밖에 두고 우왕좌왕하며 쉽게 흔들리는 모습이 나를 믿지 못해서라는 걸 왜 그토록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지겹고 지겨운 말이지만 낮은 자존감 이슈는 내게 해당하지 않는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무얼 하든 평균 이상으로 했고 노력하면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되었으니 나는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 앞에 서면 온몸이 떨렸고 시험은 기절할 만큼 긴장되는 일이고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고민하다 늘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남들도 이 정도의 이면성은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닝페이지를 시작했을 때 내 불안과 분노는 노트줄만큼 자주 적혔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겠노라고, 남을 믿지 않겠노라고, 남에게 중요한 마음 한 조각을 내어주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도 그 다짐은 되풀이되었다. 다시 읽고 밑줄 치는 과정을 거칠 때도 이 패턴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무언가에 씐 것처럼 빤히 보고서도 못 본 척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렇다면 내 눈을 씌우고 있던 암막이 거두어진 것은 어느 날 갑자기인가. 체감상 그건 어느 날 갑자기였다. 후드려 맞은 것 같은 일주일 간의 게실염 투병과 돌치레하는 아이 간병으로 마치 누군가 온몸을 두들겨 패면서 정신 차리고 눈을 뜨라고 윽박지른 것처럼 정말 중요한 건 나라는 걸 절감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내 놀라운 마음의 변화를 말했다. 아프다고 다 그런 줄 아냐. 친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게실염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정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프다고 항변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의 말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2019년부터 지금까지 모닝페이지는 드문드문하지만 결코 쓰는 걸 멈추지 않았다. 패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며 한심스러워했지만 그것마저도 패턴이 보이게 끊임없이 내 마음을 적은 일기와 모닝페이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지역자치단체에서 지원하는 청년 상담 홍보글을 보고 시간을 맞춰 지원했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며 미심쩍어하면서도 내가 만약 부모가 된다면 내 가슴에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 큰 응어리를 풀어야 한다는 기묘 하리라만치 강한 확신과 의무감을 느끼며 몇 번이고 지원했다. 아이를 낳고 자연 발생적 모성애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라는 걸 몸소 깨달았고 동시에 거기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주변 모든 이가 원래 그렇다고 말했지만 나는 원래 그렇다는 게 괜찮다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확신했고 아이를 엄마에게 부탁하고 상담받으러 갔다. 여러 회기의 상담을 세 차례 받았고 그때마다 크게 울었다. 마지막 상담에 울음은 티슈 두 개로 해결될 수 있을 만큼 줄었고 줄어든 울음만큼 분노도 잦아들었다. 5년이다. 게실염과 아이 돌치레 간병은 5년 노력의 방점일 뿐 5년 간 멈추지 않은 노력에 대체되지 않는다.


감정과 생각의 중심이 내가 되면 세상의 사랑노래가 나를 향한 세레나데가 된다. 세상의 사랑노래가 나를 향한 세레나데가 된다는 건 사랑하는 ’ 당신’이 내가 되어 가장 좋은 걸 주고 가장 좋은 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잠들기 전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 읊조려주고 싶어 진다는 뜻이다. 나르시시즘이나 이기심과 다른 감각이다. 자격 없거나 메아리 없는 이에게 쏟아붓는 나의 애정과 시간과 노력이 마땅한 이에게 향하는 감각이다. 바로 나 자신에게 말이다. 누군가는 그러다가 주변 모든 사람이 떠나거나 정말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사적 경험으로 미루어 거칠게 판단하건데 대부분 여성은 주변 사람이 떠날 정도로 제 자신에게 집중하는 고도의 이기심을 부릴 수 없다. 이 정도는 자기 자신에게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지 싶은 수준에서도 너무 이기적이지 않느냐며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점검하기에 바쁘다. 내가 그랬다. 중도, 균형이라 불리는 그 어떤 지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도 눈치를 봤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가. 너무 가족을 챙기지 않는가. 너무 나만 생각하는가. 배려와 공감은 선택적이어야 하는데 만성적으로 내 삶을 점유했다. 이것들이 다 누군가의 인정과 확인을 갈구하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즉 감정과 생각의 무게중심이 바깥에 있다는 표지다. 그리고 너무 이기적으로 굴면 또 어떤가. 삶의 많은 시기 남 생각만 많이 했으니 반대로 살아보면 균형이라는 걸 더 잘 잡을 수 있겠지.


2022년, 글쓰기와 운동 루틴으로 나를 다지며 그걸 남편이 알아주지 않아 눈물을 쏟는 나를 다시 떠올린다. 으이그 이 멍청아, 하고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제가 하는 일이 맞는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나를 본다. 나보다 나이 어린 다른 사람이 그러고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으이그 이 멍청아 왜 울어하고 타박하는 대신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고. 네가 적고 또 적어줘서 지금 내가 날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네가 운동을 계속한 덕분에 마음 무겁고 우울한 날 끝에 결국 다시 일어서는 체력을 갖췄다고. 몇 년 후에 너는 날 만나게 될 테니 걱정 마. 꿈에서라도 말해주고 싶다. 나를 향해 그치지 않는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