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모르는 사람과 점심을 먹는다.

BD의 일상

by 정요한

제약바이오 BD에게 컨퍼런스는 마치 롤(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들의 ‘대회 시즌’ 같다. LCK 플옵, MSI, 월즈처럼 1년 내내 큰 무대가 깔려 있다. 평소의 리그 성적도 중요하지만, 결국 대회 성과가 진짜다. 컨퍼런스나 학회에 가면 우리 BD들은 두 개의 게임을 해야 한다. 첫 번째 게임은 행사 몇 달 전부터 시작되는데, 사전에 미팅을 잡고, 그렇게 확정된 미팅을 행사에 가서 해내는 게임이다. 다른 하나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즉석 네트워킹이다.


행사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조금 작은 행사에 가면 다 같이 섞여 밥을 먹는다. 일반적으로는 동그란 스탠딩 테이블이 쫙 깔려 있는데, 밥을 받는 순서에 따라 랜덤으로 식사 그룹이 형성된다. 정말 철저하게 계획하고 움직이지 않는 이상 누구와 어떻게 만나 밥을 먹게 될지 모르니, 테이블에 가서 접시를 내려놓기 전까진 누구와 어떤 대화를 하게 될지 모른다. 비즈니스일 수도 있고 그냥 캐주얼한 잡담일 수도 있다. 미국의 스몰토크 문화는 사실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영어 모드를 켜두고 늘 긴장하고 있으니 보통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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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사에서는 조금 더 특별한 게임을 하고 왔다. 스페셜 미션을 받게 되었다. 글로벌 대기업 제약사 X사의 대표로 참석하신 박사님께 우리 신약과 플랫폼을 소개하라는 임무. 문제는… 그 분과 사전에 미팅을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어떻게든 그분을 ‘만나서’, ‘대화’할 상황을 만들어내고, 임팩트 있게 피치를 하여 잠재적 사업 기회로 발전시켜 보는 것. 즉 ‘자연스러움’이 곧 실력인 게임이었다. 참… 다시 봐도 산 넘어 산이다.


내가 만날 박사님은 Mike라는 분이셨고, 금요일 첫 세션의 패널이었다. (대충 꽤 대단한 분이라는 뜻). 목요일엔 행사 자체에 참석하지 않으셨지만 금요일 아침부터 무대에 서시는 덕에 다행히 얼굴을 익혀둘 수 있었다. 행사는 이어졌고, 몇 시간 뒤 30분짜리 커피 브레이크가 왔다. 나는 이날 사실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스페셜 미션이고 뭐고 응급처치로 일단 뜨거운 물에 꿀부터 타먹어야 했다 ㅋㅋ. 그렇게 뜨끈한 걸 좀 마시며 정신을 좀 차리고 박사님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패널만 하고 가신 건가…?” 이러면 진짜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멀뚱히 있을 순 없어 테이블 몇 군데를 돌며 인사하고 대충 스몰토크 좀 하다가, 혹시나 해서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유레카.

저쪽 코너에서 물을 뜨고 계셨다. 나는 홀을 가로질러 가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가 정수기에서 가까운 쪽 문으로 자연스럽게 다시 들어갔다. 박사님은 이제 물을 다 뜨고 슬슬 이동하시려는 찰나. 나는 이 타이밍을 놓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후 다가가서… 물통을 만졌다. 큰 철 같은 통이라 안에 물이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이리저리 만져보며 “이거 찬 물인가요?” 라는 아무말을 던졌다. ㅋㅋ.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물’로 몇 마디를 주고받고, 아까 패널에서 뵀다고 인사하며 나를 소개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서서히 빌드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와서 끼어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바로 자기 신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한숨이 나왔지만 웃으며 경청하는 척 참았다.


꽤 시간이 지나고 그분이 떠나자 Mike 박사님은 조금 지쳐 보였다. 젠장. 그래서 힘을 조금 빼고, “혹시 이따 한 5분 정도만 시간 내주시면 저희 것도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는 xx 타겟을 xx 방식으로 푸는 프로그램이 있어서요.” 라고 던졌다.


박사님은 미국 사람답게 흔쾌히 좋다고 하셨지만, “뭐~ 이따 보든가, 아님 연락처 줄 테니 나중에 보든가”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살짝 불안했다. 아까 나도 보스턴에서 지내고 있고 그분도 보스턴 분이라는 대화를 괜히 했나? 라고 생각하며 후회했다…


행사는 또 이어졌고 몇 시간 뒤, 점심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는데 박사님은 옆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고 계셨다. 나는 뒤에서 살짝 얼쩡거리며 기다렸다. 문제는, 왼쪽 대각선에도 누가 서 있었다는 것. 넌 뭐냐. 그 사람도 Mike를 기다리는 건지 옆 사람을 기다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두 분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왼쪽 대각선 분은 다행히 다른 사람에게 갔고, 나는 그 틈을 타 Mike 박사님께 슬쩍 다가갔다.


“혹시… 점심 다 드시고 찾아뵈면 될까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점심 먹으면서 봐도 되고!”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10분 뒤, Mike 박사님과 1층에서 둘이서만 점심을 먹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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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에서 나와 줄을 서서 음식을 받아 들고 테이블을 찾으려 했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그때 박사님이 말했다.


“그냥 아래층 가서 앉을래?”


순간 ‘이게 웬 횡재냐?’ 싶으면서도 ‘여기 밥을 아래층에서 먹어도 되나?’ 같은 걱정도 들었지만, 그냥 고이 접어서 넣어두었다. 기회는 잡는 사람의 것이니까! 나는 좋다고 답하고 앞장서서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그 이후는 history다.


나는 내 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넘어 200%, 아니 한 500% 초과 달성했다. 사전 미팅을 잡았다면 20분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거의 한 시간 동안 밥을 먹고, 대화하고, 서로 웃으며 라포를 쌓은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는 우리 파이프라인과 플랫폼을 소개하며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피드백까지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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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를 하다 보면 늘 ‘기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주변에서 많이 듣고 나 스스로도 경험하는 것 하나는, 내가 놓친 기회를 다른 누군가는 채간다는 것이다. 나는 치밀하게 움직여서 이 기회를 잡아냈고, 그 덕에 내가 해내야 하는 대화를 했고, 새로운 관계를 텄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모르는 사람과 점심을 먹었다.



PS. 이 글의 퇴고를 마친 오늘 저녁은, 지난주 또 다른 행사에서 처음 만난 또 다른 박사님과 저녁을 먹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한 5분 정도 대화했던 것 같은데, 나도 내 일상이 참 신기하다. 이 박사님은 글로벌 제약사 S사의 사이언티스트다.


PPS. 미국엔 Taco Tuesday라는 문화가 있다. 화요일에 Mexican 식당을 방문하면 타코 세일이다. 오늘 갔던 식당은 타코 3개에 12불이라 배 터지게 먹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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