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D의 시력이 곧 실력이다.
제약바이오 세계는 매일 새로운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이 정도로 뉴스거리가 끊이지 않는 산업이 또 있을까 싶다. AI 덕분에 요즘 가장 뜨거운 빅테크 쪽보다도 그 밀도가 높다고 본다. OpenAI, 앤트로픽, 구글이 새로운 모델을 내놓고, 벤치마크 테스트로 자랑하고, 그 사이사이 새로운 서비스들이 떼거지로 출몰하는 속도가 심히 빠르지만, 제약바이오의 뉴스거리는 훨씬 더 다채롭고 방대하다.
이 섹터는 밸류 체인이 거대하고, 무엇보다 표면적이 넓다. 산업 안에 그 산업을 이루는 수많은 산하 산업들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다는 뜻이다. 이 거대한 세계는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예능의 팀 구성처럼 말하자면 OB와 YB 팀이다. 제네릭이라 불리는 복제약들이 OB라면, 혁신 신약이라 불리는 약들을 YB라 할 수 있겠다. 타이레놀, 이가탄, 아스피린 같은 약들도 한 때는 세상을 놀라게 한 신약이었지만, 특허가 만료되어 누구나(어떤 회사나) 범접할 수 있게 되면서 약가가 인하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시간이 흐르고 산 위에서 물줄기가 시작되듯, 제약바이오라는 산업의 모든 흐름도 신약 개발에서 시작해 아래로 흘러간다.
신약 개발이라는 우주 안에 또 다른 수많은 소우주들이 존재한다. 지구 안에 대륙들이 있고, 대륙들을 이루는 나라들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와 연주자들의 관계와 같다. 악기라는 소우주 안에는 악기들을 생산하는 장인과 공장이 있겠고, 악기 판매점, 기타 천국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 현악기의 줄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회사들도 있다. 연주자라는 나라 안에는 레슨 선생님, 음대, 동네 학원, 콩쿠르, 연주 영상을 올리는 유튜브 채널들이 있는 것처럼, 신약 개발 역시 기초 연구부터 임상, 제조, 유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문 객체들이 입체적인 생태계를 이룬다.
이 미로 같은 신약 개발 섹터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결승선] 중 하나가 바로 [신약 승인]이다. 규제 기관의 판매 허가를 말한다. 1960년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사건' 이후 제약 산업이 점차 현대적 모양을 갖춰가며, 가장 엄격하게 규제화된 섹터가 되었다. 식품과 비슷하게, 우리 인간의 몸 안에 직접 들어가 작용하는 이유다. 각국의 규제기관(한국 식약처, 미국 FDA, 유럽 EMA 등)은 그래서 결코 쉽게 승인을 내어주지 않는다. 철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약의 작용기전과 인간에게 실험된 연구 결과들을 제출하게 하고, 그걸 쥐 잡듯이 검증하고 또 검증한다. (실제로 신약 개발을 위해 쥐를 정말 많이 잡는다. 실험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문제는 그 결승선이 너무나 아득하다는 것이다. 까마득히 멀다. 마치 42.195km 풀코스 마라톤의 결승선을 이제 막 신발 끈 묶으며 서있는 0km 지점에서 보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긴 여정 사이사이에 수많은 '중간 지점'에 대한 뉴스가 생산된다. 2km 지점 돌파 소식, 5km 지점에서는 물이 아닌 파워에이드를 마셨다느니, 파워에이드를 마시려다 컵을 놓쳐서 수분 섭취를 못하고 레이스를 이어갔다느니, 예상보다 5km 지점을 느리게 통과했다느니, 30km 지점 도달 전에 종아리에 쥐가 나서 레이스를 포기했다느니. 이런 게 다 뉴스로 나오는 셈이다. 실제로 시드 투자 소식부터 시작해 임상 1상 개시, 빅파마 베테랑의 이직, 임상 중단 등, 뉴스 재료는 끝이 없다. 옛날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글로벌 미디어의 시대라는 걸 간과하면 안 된다. 뉴스는 더 이상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몇 초 내에 쫙 퍼진다. 박지성보다 손흥민이 더 큰 글로벌 슈퍼스타처럼 보이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매년 열리는 ASCO, ESMO, BIO International, JPM 헬스케어 컨퍼런스 같은 메이저 컨퍼런스나 학회는 이 뉴스들이 폭발하는 장이다. 전 세계의 연주자들이 모여 자신의 악기 소리(신약 데이터)를 뽐내고, 사냥꾼들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비행기를 탄다.
나의 직무인 BD라는 연주자들은 특히 이 '뉴스'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매일 뉴스를 챙겨 보고 업계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주 업무 중 하나다. BD는 기본적으로 신약이라는 기술과 권리를 사고파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상인이 시세를 모르면 도태되듯, 시장 상황에 빠삭해야 한다. 내 경쟁자들이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 15km 지점에서는 물을 마셨는지 파워에이드를 마셨는지, 파워에이드를 마셨다면 그게 남은 레이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영향으로 인해 최종 기록이 어떻게 예상되는지 끊임없이 파악하고 분석해야 한다. 내 연주에 집중하면서도 옆 사람의 소리, 지휘자의 손짓, 관객의 반응을 모두 살피는 연주자. 이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가공해 내 연주(전략)에 녹여내는 것이 BD의 본질이다.
제약바이오 섹터는 기초 연구부터 임상, 규제, 금리와 환율 같은 거시 경제 환경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일하며 가장 깊게 체감하는 것은 [시야의 중요성]이다. 시야는 곧 시력(視力)이자 실력(實力)이다. 보는 힘. 시야의 차이가 초점의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멀리, 그리고 넓게 볼 수 있어야 역설적으로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그 메타인지를 레버리지 삼아 경쟁자보다 한 발 앞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이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핵심이다.
마라톤이기 때문에 다치지 않고 완주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누구는 완주에 의의를 두는 반면, 누군가는 2시간 5분이냐 2시간 5분 30초냐 하며 초단위의 기록 경쟁을 하고 있다. 제약바이오도 하나의 산업이다. '약'으로 '생명'을 살린다는 숭고함과 순수함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다. 이익과 성장 없이는 그 어떤 소망도 지속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이 그 밑에서 버티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홍수 같이 휘몰아치는 시장의 노이즈와 냉혹한 현실의 숫자를 읽어내는 시력만이 생명의 순수함을 끝까지 지켜낼 실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