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평가의 기본

쓰레기통 옆에서 들은 김 이사님의 가르침

by 정요한

디즈니 월드의 도시, 미국 올랜도. ASH(미국혈액학회) 현장.


올해도 어김없이 2만 5천여 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제약바이오 업계의 거대 행사들이 으레 그렇듯, 이곳은 R&D(연구 개발)의 치열함과는 또 다른 Commercial(사업/영업) 파트의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다. 실질적으로 돈을 벌어오는 부서들이 주도해서 그런지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전시회장에 들어서면 글로벌 빅파마들의 부스는 압도적이다 못해 위압적이다. 상상을 초월한다는 설명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들은 부스가 아니라 궁궐을 짓는다. 심지어 회사 부스 외에 대표 약물 부스는 또 따로 운영한다 ㄷㄷ. Commercial 팀의 막강한 예산으로 쏘아 올린 화려한 조명과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스크린 사이즈. 4D 터널이나 실제 성인을 훌쩍 뛰어넘는 크기의 홀로그램 같은 신문물을 보면 얼이 빠질 정도다. 뿐만 아니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음식 냄새가 전시장을 채운다. 이 학회는 특이하게도 굿즈 배포를 금지한 탓에 화이자 같은 대기업들은 아예 인텔리젠시아 라든지 그런 유명 카페를 통째로 불러와 운영하거나, 갓 구운 크로플 냄새로 방문객들을 유인해 엄청난 웨이팅 줄을 세운다. 그 자본의 성벽 앞에 서면 우리 같이 음식 하나 안 주는 작은 회사들은 자연스레 위축된다.


275개가 넘는 전시 업체 중 하나인 우리 부스는? 정말 미니멀하다. 솔직히 말하면 초라하다. 첫날 우리 부스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쓰레기통이었다. 의사, 박사 참석자들이 옆의 으리으리한 부스에서 받은 공짜 음식을 먹고 쓰레기는 옆에 만만한 우리 부스에 와서 버린다. 하놔. 옆에 큰 쓰레기통이 분명 있는데 왜 자꾸 우리 거에 버리고 간담 ㅋㅋㅋ. 다른 컨퍼런스에서는 우리도 나름 이쁜 펜이나 멀티 충전기 굿즈로 쏠쏠한(?) 방문자 수를 쌓는데… 우리 마케팅 팀은 다음 주에 무조건 한소리 들을 예정이다.


학회 첫날, 트래픽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적막(과 쓰레기)만 남은 오후 3시 즈음. 방문객이 뜸한 덕분에 이사님과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업무와 전략 이야기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사님이 툭 말을 꺼내셨다.


"요한, 며칠 전에 인사팀 통해서 쓴 자기평가서 있잖아요,"

순간 긴장했다. 1점부터 5점까지의 척도. 나는 업무 성과에는 4점들을 줬지만, 업무 태도나 윤리 같은 항목에는 3점(보통)을 줬다. 사실 이번 하반기 나는 보스턴으로 발령받아 와서 적응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나름 치열하게 달렸다. 마음속으론 5점을 좀 줘도 되지 않나 싶었지만, 내 손은 끝내 5점을 찍지 못했다.


'너무 튀지 말자. 5점은 너무 과해 보일 수 있어. 안전하게 가자.' 그렇게 나는 스스로 4점과 3점 사이에 나를 가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사님은 나를 혼내는 것도, 답답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십수 년 전의 자신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도 그랬는데. 첫 직장인 삼성연구소 다닐 때, 나도 요한처럼 썼었어. 근데 그때 누가 그러더라." 이사님은 담담하게, 먼저 겪어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현실적인 지혜를 나눠주셨다.


"회사라는 곳은 위로 올라갈수록 깎는 게 일인 사람들 천지야. 내가 100을 적어 내도 80으로 깎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게 윗사람들이라고. 근데 내가 알아서 80점을 적어 내면? 그들은 편안하게 60점으로 만들어버려. 그게 그들의 일이니까. 요한부터 낮게 써버리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이사님은 커피를 내려놓으며 쐐기를 박으셨다.


"상한선(Cap)을 너가 먼저 닫지 마. 일단 무조건 높게 잡아. 깎이는 건 나중 문제고, 평가는 위에서 하는 거야. 네가 먼저 너를 깎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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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사님의 말씀은 단순한 연봉 협상 꿀팁이 아니었다. 내 내면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어떤 메시지로 다가왔다. 나는 왜 5점을 피하고 3점과 4점 뒤로 숨었을까?


여러 말 못 할 이유가 있지만 돌아보니 두려움이었다. 어릴 적부터 이민자로, 전학생으로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자라온 내 안에는 생존 본능이 각인되어 있었다.


'너무 튀지 마라. 안 그래도 특별한데 더 눈에 띄면 공격당한다. 안전하게 중간만 가자.' 나도 모르게 작동한 그 이민자 키즈의 방어 기제가 이번 평가서에도 그대로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 3점은 겸손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은폐 엄폐였다.


사실 이 메시지는 최근 3개월간 내가 끊임없이 마주하려고 애쓰던 화두였다. 자기계발 커뮤니티, 윤멘토,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계속 들려오던 메시지인 자기 사랑과 자기 인정. 친한 형이 자주 하는 말 중 "같은 메시지가 세 번 들리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한다"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하는데, 이건 정말 빼박이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욕망이 꿈틀대는 이곳 ASH 학회장에서, 가장 초라한 우리 부스 쓰레기통 옆에서, 나는 딱 나만을 위한 강력한 위로를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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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나를 박하게 대하면 우짜겠노. 내가 나를 소중히 여겨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소중히 여겨줄까?'


나는, 특별하지만 그 특별함을 스스로 인정해주지 못해 왔다. 세상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자기평가의 기본을 못 지키고 있었다. 감사히도 그런 내게, 좋은 어른들이 와주신다. 이번엔 나의 상사이신 김 이사님의 가르침이 나의 의식을 깨웠고, 평생 '안전함'을 찾아 3점짜리 벙커에 숨어있던 꼬마 요한이를 데리러 들어가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일 다시 그 초라한 부스로 나간다. 비록 옆집 빅파마들의 성벽에 비해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 자신은 나를 초라하게 대하지 않기로 했다.


벙커에서 나갈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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