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제안이란 무엇인가

제안을 받아보면 내 욕망이 보인다.

by 정요한

내 책상에는 지금 여섯 개의 제안서가 쌓여있다. 다음 주 안으로 몇 개는 더 들어올 예정이다. 제안서를 쓰는 것도 힘들지만 제안서를 받고 딱 하나의 업체를 선택하는 일도 쉽진 않다. 우리도 R&D 서비스를 해오던 회사다 보니 우리 쪽에서 제안서를 준비해 수주를 따내는 일이 더 많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프로젝트를 의뢰하는 상황이다. 수십 장 짜리 되는 빽빽한 제안서들을 검토하면서 좋은 제안이란 과연 뭘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저글링은 어렵다. 모든 공을 챙겨야 하니 그렇다. 위에서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이 모든 업체들을 저글링 하고 있어야 하는 내 모습과 이 상황에 한숨이 나온다. 어장관리하듯 이 업체들과 장난칠 마음이 있는 게 아니니 더더욱 그렇다. 역시 중간에 끼인 자가 늘 제일 고생하는 게 현실이다. 어쩌겠나. 지혜롭고 투명한 진심으로 잘 소통하며 헤쳐 나아가야지.


문득 헤드헌팅이 떠오른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한 번쯤은 헤드헌터에게 제안을 받게 된다. 그 제안이 왔을 때 내가 오케이 하고 이직을 시도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지금 이 회사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만족도,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 이직할 회사의 네임벨류와 조직 상황, 연봉, 사무실 위치 등 고려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반적인 헤드헌터는 이 모든 걸 꿰뚫고 제안하는 게 아닐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좋은 제안이란 그저 운으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는 말인가?


우리가 이번에 RFP(제안요청서)를 뿌린 건은 전략 컨설팅 프로젝트다. 우리 쪽에서 필요한 분석 내용을 정리해 보냈고, 컨설팅 업체들은 그 내용을 어떻게 조리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제안서에 담아 제출해 주었다. 각 업체마다 가지각색이다. 나는 6주를 예상했지만 타임라인도 조금씩 다르고, KOL 인터뷰 수나 과거 업계 실패 사례 비교 방식,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가격도 다 다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갑과 을이 나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의뢰자=갑, 업체=을이라고 할 수 없다. 양쪽 다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진 채 제안을 주고받지 않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사실 대부분의 의뢰자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뭐가 필요한지 정확히 모르기에 괜히 많은 정보를 오픈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의뢰자는 뭘 모르니까 의뢰하는 건데 그럴듯한 제안서 몇 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 괴롭고, 업체들은 상대가 뭐가 필요한지 명확히 알려주지 않은 상황에서 제안을 해야 하니 불안하다. 처음부터 모든 걸 알려주자니 의뢰자의 진짜 니즈가 다 파악도 안 됐는데 헛챔질 하게 될 수도 있고, 최소한만 알려주면서 간만 보자니 다른 업체에게 뺏길 것 같고. 이 밀당의 조절은 평생의 숙제 같다. 그러니 제안서 회신 이메일마다 "검토 이후 업무 스콥이나 가격 조정이 필요하시다면 편하게 말씀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장이 약속이라도 한 듯 붙어 있다. 결국 더 급한 쪽이 끌려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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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제안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제안이다. 전망도 밝지 않고 집에서 너무 먼 회사로 추천해 주겠다는 헤드헌팅 제안이 온다면 움직일 마음이 전혀 들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성장할 각이 보이는 회사인데 패키지 조건도 좋다면 아무리 이직 생각이 없었다 해도 내 엉덩이를 들썩이게 할 것이다. 매력적인 제안이란 무엇인가? 역설적으로 제안 그 자체보다 현재 나의 상태와 상황이 어떤지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내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단 일은 진행되어야 하니 내가 총괄하고 있지만, 우리 내부의 기준이 아직 명확하지 않다. 예산 상한선은 얼마인지, 언제까지 최종 결과물을 원하는지, 가장 필요한 핵심 결과물 하나가 무엇인지 나에게 딱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제안을 주는 업체들에게 모든 걸 솔직하고 투명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끔 보면 외부와의 문제 해결보다 내부적 문제 해결이 훨씬 어려운 것 같다.


결국 헤드헌팅 제안이나 컨설팅 제안이나, 받는 사람이 뭘 원하는지 알아내 그걸 주지 않는다면 탈락하게 되어 있다. 소개팅과 똑같다. 지인들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요구사항을 늘어 놓는 그 놈이 되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냥 뭐~ 이쁘면 되지~"라고 했을 때 과연 좋은 사람을 소개해줄 수 있을까?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자신과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비즈니스도 모든 사람과 연결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좋은 제안이란, 제안요청서가 왔을 때 자신과 '적'을 잘 파악해 요청자가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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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개된 <이 사랑 통역 되나요>라는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세상에 다른 언어가 몇 개인 줄 아나? 세상 모든 사람의 수만큼 있지. 사람들은 각자 다 자기 말을 해. 그러니까 서로 못 알아먹고 거꾸로 듣고 막말을 하지."


언어만이 문제가 아니다. 조직 안에서도 이해관계는 복잡하다. 한 회사의 경영진 안에서도 단기적인 가치를 위해 일하는 자와 장기적인 가치를 위해 조직의 정렬에 힘쓰는 자가 공존한다. 의견 차이란 타사와의 수주 경쟁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같은 팀 안에서도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더더욱 나에게 필요한 게 뭔지,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게 뭔지 파악하고 일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불안의 악순환을 끊어야 건강하게 지속되는 비즈니스를 꾸려갈 수 있다.


좋은 제안서를 고르는 일은 결국 우리 내부의 언어를 통역하고 정돈하는 일이다. 빽빽한 제안서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그건 어쩌면 제안서의 부실함이나 허탕이 아닌 우리 욕망의 불투명함을 가리키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비즈니스도 결국 사람과 관계로 수렴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에게 필요한 게 뭔지 정리해 둔 사람에게 좋은 제안이 오는 법이고, 그 제안이 결국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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