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와 미국말의 차이

미국말은 기세와 맥락의 축적이다.

by 정요한

나는 미국 보스턴으로 발령받아 온 뒤로 '미국말'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 영어보단 미국말이다. 이 둘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네가 미국으로 갔으니 당연히 미국말을 하는 게 아니냐고 하실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한 예로, 나는 미국말을 키우기 위해 바이오테크 커뮤니티의 '판타지 풋볼 리그'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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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굉장히 복합적인 요소다. 그 안에 문화가 녹아 있고, 가치관과 철학 등 수많은 요소가 축적되어 한 나라의 언어로 발현된다. 한글과 영어는 단순한 언어 차이를 넘어 그 뿌리인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비록 내가 영어는 '좀' 한다 하더라도 내 의식은 여전히 한국적/동양적인 사고력이 강하게 주도한다는 게 여기 오니 더 강하게 느껴진다. 둘 중 뭐가 더 좋고 나쁘고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곳에서 해내야 하는 사업적 성과를 위해서는 영어 그 이상의 ‘미국말’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뿐이다.


근데 미국말이랑 미식축구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심지어 내가 직접 뛰는 것도 아니고 게임인 판타지 풋볼이라니.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한 번 풀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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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흐름은 이랬다. 우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로컬 친구들이 무조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감사하게도 작년 9월 보스턴 출장 때 한 행사에서 만난 BD 친구가 있었다. 보스턴 로컬이면서 한국 바이오 기업 미국 지사에서 근무해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으신 분이었다. 지난 5월 발령 후 다시 그분과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가 500명이 넘는 왓츠앱(WhatsApp) 제약바이오 그룹챗의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그 덕분에 그룹챗에 들어가 키 멤버들을 소개받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몇 달간 그들이 참석하는 네트워킹 행사를 따라다니다 NFL 시즌을 앞두고 판타지 풋볼 참가자를 모으는 공지를 보았다. 실제 선수를 뽑아 가상의 팀을 만든 후 선수들의 실제 기록을 점수화해 겨루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나는 어릴 적 미국에서 자란 덕에 미식축구 룰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보스턴의 박사급 제약바이오 종사자들과 매주 함께 놀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단 몇 분도 고민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그렇게 단톡방에 초대되어 매주 trash talk도 하고 리그 뉴스에 대해 떠들며, 올 시즌을 3위라는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영어보다 미국말이 늘었다고 느낀다. 이 시간을 통해 새로운 단어를 엄청나게 배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판타지 풋볼이라는 미국 문화의 액기스를 직접 경험하며 미국 사람들이 놀 때 어떤 마인드를 취하는지, 이럴 때는 어떤 표정과 뉘앙스로 말하는지를 배웠다. 즉, 미국말의 데이터와 컨텍스트 그 자체를 몸소 체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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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미식축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판타지 풋볼 리그에 참가한 이후 미식축구를 챙겨보며 성공과 실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미식축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터치다운이지만, 공격팀은 4번의 기회 안에 10야드를 전진해야만 다음 기회를 얻는다. 이를 ‘다운을 갱신한다(First Down)’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선수들이 터치다운을 하지 못하고 중간에 넘어졌음에도, 10야드 전진에라도 성공하면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며 세리머니를 한다는 것이다. 엔드존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기회를 연장했다는 사실 자체를 자축한다.


흔히 영어는 자신감이고, 미국은 자기 PR의 나라라고 한다. 나는 미식축구의 저 장면을 통해 이 포인트들이 ‘클릭’ 되었다. 한 번에 엔드존에 못 가도 괜찮다. 사실 못 가는 게 정상이다. 넘어져도 전진한만큼에 대해 축하하며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면 되는 것이었다. 핵심은 넘어진 사실이 아니라 내가 달려가서 얻어낸 거리다.


언어도, 비즈니스도, 삶의 기술도 하루아침에 터치다운할 수는 없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5초 만에 스킬을 업로드할 수 없기에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 포기하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내가 밟은 땅만큼 나를 인정해 주며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는 것. 나는 미식축구를 통해 그걸 배웠다. 그게 바로 ‘영어’ 그 이상의 미국말이었다.


여러분도 단어를 바꿈으로써 개념과 목표를 바꿔야 할 것이 있는가? 한 끗 차이 같지만 언어는 강력하다. 맥락을 이루는 건 결국 단어 하나하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지금 영어를 키워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말을 키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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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직접 뵙거나 대면 수업을 들은 적은 없지만, 오래전부터 페이스북으로 팔로우하며 깊은 영감을 얻은 빈 리(Bin Lee) 선생님을 shout out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분의 뒤를 이어 강의를 맡게 된 특별한 인연도 있었지요. '미국말'이라는 개념을 제게 처음 일깨워준 분이자, 선생님의 SNS 활동을 통해 언어 그 이상의 맥락을 참 많이 배웠습니다.

https://www.facebook.com/watch/?v=1990443998408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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