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갈라서라도 멈추고 싶은 본능

다이어트는 Need인가 Want인가?

by 정요한

'의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우리의 질긴 인연 하나를 소개한다. 짜잔. 바로 다이어트다. 다이어트만큼 의지력과 상관관계가 명확한 게 없다. 다이어트 밈이 그렇게나 많은 이유는 결코 얕볼 수 없는 난이도와 그 앞에 무릎 꿇는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참 좋은 소재기 때문이다. 배고픔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연약해진다. 생리적 욕구인 배고픔은 그만큼 다루기 힘든 '힘' 중 하나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죽지 않게 하려는 힘이기 때문에 강한 게 납득되긴 한다. 과학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다 이해되지만, 살기 위해 먹는 것과 먹기 위해 사는 것 사이에서 중간을 지키는 게 왜 이리도 어려운 걸까...


살다 보면 일을 저질러 놓고 보니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범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잘 참고 있다가 뭔가를 먹어버렸을 때나 충동구매를 해버리는 그런 후회스러운 찰나들 말이다. 피시방에 갔는데 옆사람이 짜계치(짜파게티+계란+치즈)를 시켜 호로록하고 있으면 그 향기는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다. 나도 따라 시키게 될 확률이 200%다. 후각뿐만이 아니라 호르몬의 노예라고 느껴질 때도 많다. 배고프고 피곤할 때 괜히 못되지는 나를 보고 있자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하지 말자고 다짐할 때도, 오늘부터 다이어트를 또 시작했음에도,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잘 안 될 때마다 우리는 좌절하게 된다. 하지만 때로는 이 좌절이 잠시 멈추는 시기가 온다. 내가 대단한 주권을 되찾아서가 아니라 단지 본능을 억제할 환경 속에 놓였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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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 살 당시 종종 닭강정을 배달시켜 먹곤 했다. 유독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퇴근한 날 저녁이나 야식으로 혼자 깔끔하게 먹기에 닭강정은 탁월한 선택이다. 성수동에 살았기에 근처에 맛집은 널렸고, 쿠팡이츠든 배민 안에서 잘 고르는 '선택의 영역'이었지 한 번도 '차라리 가서 먹고 말지'라는 귀찮음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 보스턴은 다르다. BBQ치킨이 있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bb.q"라고 되어 있고 주인은 중국인이라는 소문이 있다. 미국식 윙 맛집들도 치킨의 나라에서 온 나에겐 뭔가 2%씩 부족하다. 내가 훌륭한 절제력을 가지고 있어서 야식을 참게 되는 게 아니라 비싼 물가와 그에 상응하지 않는 맛 때문에 참게 되는 것이다. 내 계좌를 지키기 위해 치킨을 참는 것뿐이다.


하지만 참는 것도 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아직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된 이후 찐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을 마주한 적이 없어서 그렇지,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또 모른다. 그때는 정말 이성의 끈을 놓고 근처 한국 식당에서 한국의 몇 배 되는 가격은 보지도 않은 채 떡볶이나 깐풍 새우나 족발 세트를 시키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나의 가냘픈 의지는 환경이라는 성벽에 기생한다. 문제는 이 세상엔 성벽을 무너뜨릴 맛있는 게 너무 많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라는 말로 우리의 폭식성을 정당화할 유혹도 도처에 널려 있다는 점이다. 세일즈와 마케팅은 정확히 이 지점을 사냥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무언가에게 세일즈를 당하고 있다. 수집된 쿠키와 터치 데이터는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의 가장 취약한 본능을 실시간으로 조준한다. 우리의 지갑은 한순간에 열리지 않는다. 사업체들도 그걸 너무 잘 안다. 충동구매든 고심 끝에 지르는 것이든 사실 우리의 무의식에 수십 번 입력되어 왔던 마케팅과 브랜딩으로 포장된 공격이 누적되어 터지는 순간일 뿐이다.


내 본능은 늘 어렵게 세운 나의 의지를 함몰시켜 버리고, 알고리즘은 편리함을 내세우며 나의 주체성을 갉아먹어 날이 갈수록 더 끈적하게 내게 들러붙고 있다. 어딜 봐도 적밖에 안 보이는 세상 속에서 개인의 의지라는 건 얼마나 처량한 힘인가.


결국 이 전쟁에서 승산이 없음을 깨닫는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의지력을 향한 믿음을 깔끔히 정리하고, 자신의 하드웨어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선택을 감행한다. 스마트폰 중독을 끊기 위해 기기를 2G 폰으로 강제 교체하듯, 식욕이라는 본능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고 고도비만 환자를 위한 위절제술이나 위우회술 같은 무리한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해는 된다. 그들에게 다이어트는 단순히 미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생존의 문제다. 의지력을 길들이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에 먹고 싶어도 더 먹을 수 없도록 몸의 구조를 변형시키는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를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순수 의지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가 이미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의지의 지속성을 그토록 엄밀히 따졌던 이유는 어쩌면 이런 위험한 수술을 감행할 만큼의 지독한 의지 또한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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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 그리고 다이어트를 해야만 한다고 느끼게끔 하는 보이지 않는 힘. 둘 다 강력히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먹어야 죽지 않아", "맛있는 걸 먹고 싶어", 그리고 "자기 관리도 요즘 시대의 경쟁력이지" 간의 치열한 삼파전이다. Need와 Want가 얽히고설킨 진흙탕 싸움이다.


이제는 무엇이 진정한 생존인지도 헷갈리는 시대가 되었다. 전통적으로는 want로 분류되는 게 더 적절해 보였던 자기 관리도 요즘은 자기 계발과 사회적 가치 창출에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가는 것만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다이어트는 want라고 해야 할까 need라고 해야 할까?


마블 세계관 같이 현대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영화들도 보면 더 이상 클래식한 확실한 주인공-악당 구조로 권선징악의 서사를 끌고 가지 않는다. 악한 듯 선한 듯 묘하게 회색지대에 놓인 캐릭터가 훨씬 자주 보인다.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Want가 먼저인가 Need가 먼저인가?" 같은 이분법도 더 이상 잘 통하지 않는다. 적절히 섞어 파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위고비라는 바이오의약품은 want와 need에 양다리를 걸치며 돈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의지를 갈아 넣는 고통도, 배를 가르는 수술도 아닌, 그저 일주일에 한 번 주사기를 드는 것만으로 이 모든 딜레마의 근원인 '본능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데 인류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다이어트는 인간의 의지력을 시험하는 끝판왕 중 하나였다. 운동을 하며 흘리는 땀과 깨끗한 음식을 섭취하며 나를 관리하는 것만큼 정직한 인과관계는 없다. Want를 봉인시키고 당장의 need를 넘어 저 멀리 있는 need와 want만을 바라보며 달리는 게 다이어트의 본질이어왔다. 하지만 이제 기술은 그 '달리는 과정'을 생략하게 해 주겠다고 속삭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해오고 있다.


고통 없이 얻는 결과는 축복일까, 아니면 인간만이 가진 자발적 고진감래라는 기이한 특권의 상실일까?


모든 게 빨라지고 효율화되어가는 이 시대. 이제 우리는 본능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대신 그 괴물을 잠재울 '시스템'을 구독함으로써 스스로를 통제하려 한다.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였던 '의지'마저 기술의 영역으로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종의 정의가 다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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