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설계하는 유일한 종, 인간

이랬다저랬다 하나만큼은 우주 최강.

by 정요한

나는 러닝을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보스턴은 참 살기 좋은 도시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심지어 눈비가 몰아쳐도 러너 한둘은 반드시 보이는 곳이 여기니까. 그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서 그런지 묘한 동기부여가 된다. 하지만 보스턴의 겨울은 악명이 높다. 웬만한 각오 없이는 현관문을 나서기도 힘든 날이 많다. 지난번에는 영하 16도에 칼바람이 부는 날씨였지만, 오히려 숫자를 맞춰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겨 토요일 아침에 찰스 강으로 나가 16km를 뛰고 왔다. 넥워머로 코끝까지 가려봐도 얼굴은 바람을 정통으로 맞아 시뻘겋게 얼어붙었고, 장갑 속 손끝은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대회도 아니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그 추위 속으로 나를 던졌을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위라는 물리적인 고통을 이성과 의지로 찍어 누르며 내가 계획한 거리를 완주해 내는 것. 그것이 인간만이 가진 기이하고도 숭고한 성질임을 몸소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듄(Dune)>의 초반부에는 주인공 폴이 '곰 자바'라는 고통의 상자에 손을 넣고 시험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상자 안에서 타오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손을 빼면 '짐승'으로 간주되어 죽임을 당하고, 그 타는 듯한 고통을 이성으로 억누르며 끝까지 견뎌내면 비로소 '인간'임이 증명된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고통에서 도망치는 것은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그 본능을 누르고 자발적으로 고통의 자리에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짐승의 차원을 넘어 인간으로 존재하는 증거라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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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종이 그렇게나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건 우리 호모 사피엔스밖에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먹이사슬 그림을 보면 인간은 최상단에 놓여있다. 사자, 고릴라, 범고래. 다 우리 인간보다 강하다. 그치만 인간이 그들보다 영리했다. 인간은 늘 타 종을 군림해왔고, 자연의 일부라는 태도보다는 자연을 써먹는 태도를 취해왔다. '제멋대로'라는 단어만큼 인간사를 잘 대변하는 단어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제멋대로 마인드가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와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컴퓨터와 반도체라는 고도로 집약된 지능의 결정체부터 안경이나 슈퍼마켓처럼 너무 당연해진 일상의 시스템까지. 인류는 자연의 법칙마저 거스르며 세상을 우리 뜻대로 좌지우지해 왔다. 질병과 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일 때조차 어떻게든 기술과 의지로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는다. 자연법칙을 제멋대로 주물러온 인간은 이제 자신의 본능, 즉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관성조차 제멋대로 거슬러 스스로 고통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대응은 늘 어렵다. 상황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수습하려고만 하면 선택의 폭은 좁아지기 마련이다. 동물들이 생존 본능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면 인간은 그 차원을 넘어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하며 자원을 투자한다. 여기서 타 종과 구별되는 아주 기이한 행동 양식이 등장하는데, 바로 '훈련(Training)'이다.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것이 상식이 된 우리에겐 평범해 보이지만, 자연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행위다. 사자가 사냥 실력을 높이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거나 가젤이 도망칠 체력을 기르기 위해 매일 아침 인터벌 러닝을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동물은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잉여 자원을 투자하는 데까지 브레인파워가 미치지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직접 설계하고 그 안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미래라는 세계에 눈을 뜬 대가로 얻은 고귀한 형벌이자 특권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매일 아침 헬스장으로 출근해 근육을 찢는 행위는 단순한 자기 관리를 초월한다. 내 시야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정복 가능한 땅이라 믿는 인간이 이제는 자기 자신의 육체라는 마지막 영토를 정복하려는 고도의 주권 행사다. 내가 내 몸의 주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인 변연계가 지르는 "당장 멈춰!"라는 명령을 전두엽의 초월적인 의지로 짓밟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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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인류 문명의 지독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우리는 수천 수만 년간 움직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완벽하고 매끄러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피땀을 흘려왔다. 버튼 하나로 음식을 소환하고, 걷지 않아도 목적지에 닿으며, 고된 노동은 기계에 외주를 주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막상 마찰이 사라진 완벽한 효율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역설적으로 그 문명 안에서 다시 억지로 움직이기 위해, 즉 다시 고통을 얻기 위해 비싼 비용을 지불한다. 편안함을 위해 돈을 쓰고 다시 그 편안함이 주는 나태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또 돈을 쓰는 기묘한 순환이다.


최근 '프로세스 이코노미'라는 개념이 주목받는 이유도 이와 닿아 있다. 갈수록 결과값이 완벽해지고 예측 가능해지는 세상에서 인간은 이상하게도 인간다움의 가치를 '결과'가 아닌 '완벽하지 않은 과정'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주사 한 방으로 살을 빼는 것이 데이터적으로는 효율일지 모르나, 굳이 무거운 쇳덩이로 쇠질을 하는 그 비효율적인 마찰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인간들이 남아있다. 고통이 삭제된 결과는 단순한 수치에 불과하지만 고통을 통과한 결과는 비로소 서사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은 '제멋대로' 마인드를 앞세워 이제 이 마지막 성역마저 건드려보고 싶은 모양이다. 미래를 설계하고 고통을 인내하며 주권을 증명해 온 인류가 이제는 그 인내하는 과정조차 효율화하고 싶다는 욕망에 눈을 뜬 것이다. "고통을 견디는 자가 인간이다"라는 듄의 명제를 비웃듯, "고통 없이도 인간의 결과값을 가질 수 있다"는 기술의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우리는 이제 그 기이했던 특권인 자발적 고진감래마저 시장에 내놓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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