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제에서 비만약으로: 왕좌의 교체

돈이 몰리는 곳에 변화는 가속화된다

by 정요한

제약바이오 산업의 왕좌가 바뀌고 있는 지점이 바로 그 증거다. 자본은 이 거대한 절망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다. 오랜 시간 제약 시장의 리더십은 항암제(Oncology)가 쥐고 있었다. 암은 인류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질병이자 극복해야 할 최후의 과제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항암제 개발의 핵심 미션은 명확하다. 바로 죽음의 유예다. 환자가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는가, 그리고 암세포의 진행을 얼마나 늦출 수 있는가. 살고 싶다는 욕구보다 강력한 욕구는 없다. 이를 반증하듯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의 매출은 부동의 글로벌 매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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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 시장이 섹터를 리드한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자가 면역 시장도 그에 못지않게 컸다. 그다음은 뭘까? 모두가 궁금해하던 바였다. 많은 사람은 MASH(대사 기능 장애 관련 지방간염)를 주목했다. 환자가 많고 치료제 개발이 어려웠던 분야라 어떤 회사가 first mover가 될지 지켜보고 있었다. 주인공은 Madrigal Pharmaceuticals였다. 2024년 3월, Rezdiffra라는 약물이 첫 MASH 치료제로 FDA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이 조용한 개척자의 행보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해일이 다른 곳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바로 비만 치료제 시장이다.


사실 비만을 정복하려는 인류의 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30년대의 dinitrophenol(DNP)부터 1950년대의 암페타민 계열 약물까지, 인류는 끊임없이 먹어도 살찌지 않는 마법을 갈구해 왔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독성 문제나 심각한 부작용으로 벨빅(Belviq) 같은 약물들이 2020년에 시장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기도 했다. 비만 치료는 그저 의지력 부족을 꾸짖거나, 위험한 수술대에 오르거나, 부작용을 감수하고 독한 약을 먹어야 하는 상인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2020년대를 기점으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피터 센게가 『제5경영』에서 언급했듯, 혁신은 독립적인 기술들이 하나의 인프라로 묶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1984년에 발견된 GLP-1이라는 호르몬은 삭센다를 거쳐 2021년 위고비, 2023년 젭바운드에 이르러 기술적 완성도와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맞물리며 폭발했다. 특히 젭바운드와 같은 이중작용제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강력한 체중 감량 효과를 입증하며 시장의 장벽을 허물어버렸다.


이 지점에서 제약바이오 시장의 왕좌는 조용히, 하지만 처절하게 교체되었다. 오랜 기간 부동의 1위를 지키던 항암제 키트루다는 여전히 분투하고 있지만 시장의 시선은 이미 '생존'을 넘어 '최적화'로 향하고 있다. 최근 시장조사기관 이밸류에이트(Evaluate)가 발표한 2026 Preview 보고서를 보면 그 지각변동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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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브랜드 이름값으로만 줄을 세우면 머크(MSD)의 키트루다가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짜 실세인 원료의약품을 기준으로 다시 판을 짜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일라이릴리의 터제파타이드(마운자로, 젭바운드)와 노보노디스크의 세마글루타이드(오젬픽, 위고비) 제품군이 나란히 1위와 2위를 꿰차며 항암의 제왕을 밀어낸 것이다. 사실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지난 3분기 누적 매출액을 기준으로 이미 터제파타이드와 세마글루타이드는 각각 키트루다의 성적표를 앞질렀다. 항암제가 '죽음으로부터의 도망'이라는 절대적 욕구를 대변했다면, 이제는 인크레틴(incretin) 기반의 비만 치료제들이 그 자리를 집어삼키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은 편의성이라는 마찰의 제거다. 최근 경구용 위고비가 미국 시장 시판에 성공하며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제는 매주 주사기를 들어야 하는 심리적, 물리적 저항선마저 무너졌다. 먹는 약의 등장은 비만 치료제 시장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게 만든다.


절대 권력을 과시하듯, 위고비는 최근 MASH라는 적응증까지 섭렵하며 Rezdiffra가 가졌던 유일한 승인 약물의 지위를 2년도 채 못 누리게 만들었다. GLP-1 치료제는 그렇게 무서운 속도로 비만뿐만 아니라 심혈관 질환, 간질환, 신질환은 물론이고 치매와 파킨슨병 같은 만성염증 영역까지 영토를 넓히고 있다.


'또 하나의 잘 팔리는 약이 등장했네'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이는 신약 개발이라는 비즈니스가 단순히 아픈 곳을 고치는 것에서 신체의 기본값을 우리의 의지대로 '튜닝'하는 영역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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