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돈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돈 몇 푼 아끼기 위해 몸으로 때우고 불편을 감수하기보다 돈을 지불해 과정을 가속화하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인다는 자본주의의 핵심 개념이다. 대중교통 대신 택시를 타는 선택이 그렇고, 꼼꼼하게 당근마켓을 뒤지는 대신 신상품을 질러 집 앞까지 로켓배송을 받는 선택이 그렇다. 부의 수준에 따라 이 선택의 스케일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비만치료제가 등장하면서 이제 이 논리는 다이어트라는 가장 육체적이고 정직해야만 했던 영역에도 적용 가능해졌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던 다이어트는 운동과 식단으로 수렴된다. 이 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질은 결국 미래를 위해 현재를 견디는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을 생각해 보자. 새벽같이 일어나 헬스장에 가거나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러닝을 뛰며 땀을 흘리는 것. 출근 전과 퇴근 후. 사실 둘 다 황금 같은 시간 아닌가. 무엇 하나 쉬운 선택이 아니다. 식단은 더하다. 내가 먹고 싶은 양보다 적게 먹는다는 것부터가 매 끼니마다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되는 결단이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걸 포기하고 퍽퍽한 닭가슴살과 야채로 끼니를 때운다는 건 대단한 자기 관리다. 아무리 요즘 맛있는 닭가슴살이 많이 나왔다 해도 말이다. 우리는 이걸 자기 관리력이라 부르지만 사실 이건 '고통을 견디는 힘', 즉 의지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다이어트가 순수한 의지의 영역이라기보다 루틴 세팅과 안정화의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손자병법>에는 선승이후구전(先勝而後求戰)이라는 말이 나온다.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겨놓고 싸움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싸움을 꼭 해야 한다면 애초에 질 수 없는 판을 짜놓고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 전략을 다이어트에 대입해 본다면 매 끼니마다 배고픔과 처절하게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실패하기 힘든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인간의 의지력은 생각보다 취약하며 변연계의 굶주림은 전두엽의 이성보다 언제나 원초적이다. 자본과 기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환경 구축’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아예 ‘기전의 아웃소싱’이라는 영역으로 격상시킨다. GLP-1 유사체 같은 약들은 배고픔을 덜 느끼게 하고 포만감을 늘려 의지라는 내면의 힘과 루틴이라는 시스템으로 간신히 지탱하던 그 무거운 짐을 약물이 덜어준다. 고통스러운 배고픔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루틴을 부드럽게 안정화시켜 주는 강력한 우군이 생긴 셈이다. 조여준 더벤처스 CIO는 이 개념을 명쾌하게 의지력의 아웃소싱이라고 정리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해본다. 이 아웃소싱은 영원한가?
임상 데이터는 냉정하다. 대표적인 비만치료제인 위고비(STEP 4 임상)를 68주간 투여한 뒤 약을 끊은 환자들은 불과 1년 만에 감량했던 체중의 3분의 2를 다시 찌우는 양상을 보였다. 젭바운드(SURMOUNT-4 임상) 역시 약을 중단하는 순간 체중계 바늘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빠르게 회귀했다. 사실 제약사들은 이미 이 결과를 알고 있었다. 제품의 허가 라벨에 명시된 용어 자체가 '만성 체중 관리(Chronic weight management)'이기 때문이다. 이는 식이요법이나 운동처럼 평생을 동반해야 하는 장기적인 치료임을 전제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비만을 두고 "약을 끊으면 혈압이 다시 오르는 고혈압처럼 평생 관리해야 하는 질병"이라 정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이 약은 한 번의 구매로 끝나는 고가의 유전자 치료제나 어떤 전리품이 아니라, 내 몸의 항상성을 새 기준점에 묶어두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평생 구독료에 가깝다. 내 의지력을 외부 시스템에 아웃소싱한 대가로 나는 비만의 생물학적 항상성과 제약회사의 장기 치료 모델이 맞물려 만들어낸 구조적 리텐션에 스스로를 묶어두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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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새로운 형태의 양극화가 시작된다. '관리된 몸'을 유지하기 위해 높은 약값이라는 구독료를 낼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해 온몸으로 식욕과 견뎌야 하는 자들 간의 격차다. 아직까지는 비만치료제가 근손실까지 완벽하게 예방해주지 못하기에 투약과 함께 운동을 병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기술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GLP-1 신약들이 점점 발전하고 근육 보존 기전까지 추가된다면 머지않아 이 약물은 진정한 다이어트 수단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약값으로 시간을 번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자본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력을 아웃소싱하여 남는 에너지를 다른 생산적인 일에 투자하거나 삶을 즐기는 데 쓸 것이다. 반면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식욕이라는 본능과 매일매일 처절한 전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이제 의지력은 상품이 되고 건강은 구독 서비스가 되고 있다.
편리하게 '안정화'된 루틴 뒤에 숨겨진 매달의 청구서. 구독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다가 '삶은 개구리 증후군'처럼 우리는 서서히 나 자신을 주체적으로 다룰 주권을 기술에, 외부의 기전에 넘겨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의지력을 기꺼이 구독할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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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질문은 매일 평일 아침 출근 전 노트북 앞에 앉아 비효율적인 글쓰기를 고집하는 나 자신에게 던지는 고백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키우고 있는 AI와 바이오테크는 인류의 오랜 숙원이었던 '마찰 제거'에 쾌거를 이루고 있다. 빅파마는 인류의 게으름을 탓하는 대신 결제 가능한 해결책을 내놓았고, AI는 고통스러운 창작과 개발의 시간을 단축해 준다. 마냥 악한 의도라고 보긴 어렵다. 인간이 늘 바라오던 발전의 자연스러운 얼굴이며, 발전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려는 효율적인 비즈니스 모델의 산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비만치료제와 LLM이 이끄는 이 의지력의 아웃소싱은 자본주의가 친히 선사한 매끄러운 지름길이다. 굳이 이 길을 거부하며 고통을 예찬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이 매끄러운 효율성 끝에서 나라는 주체의 지분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자문해 본다. AI 군단을 세워 수백 편의 글을 자동으로 찍어낼 수 있는 시대에 굳이 문장을 짓누르며 직접 쓰는 이 비효율이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미련함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마찰을 기술에 넘겨주는 순간 나라는 존재의 근육이 소리 없이 퇴화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계속 쓰게 할 뿐이다. 나는 단지 이 빠르게 매끄러워지는 세상에서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남겨두어야 할 최소한의 몫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결국 구독에 대한 고민은 존재의 정의에 관한 질문까지 이어진다. 생존이나 멋(혹은 둘 다)을 위해 안경이라는 도구에 시력을 맡긴 나는 진짜 나일까? 더 나은 생산성을 위해 AI에게 나의 내밀한 데이터에 대한 접근권을 넘겨준 나는 어디까지 나일 수 있을까? 내 의지와 노력을 아웃소싱한 끝에, 세상에 아무런 마찰도 남기지 못하게 된 존재를 여전히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결국 ‘나의 일부를 어디까지 떼어줄 것인가’라는 같은 뿌리에서 올라온다.
구독 버튼 하나를 누를지 말지, 생각보다 고민이 깊어지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