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잠시 돌려 내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의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꼬박 13시간 넘게 날아와야 닿을 수 있는 곳, 미국 보스턴이다. 물리적으로 멀디먼 이 이국땅에 살면서 문득 깨닫게 된 묘한 편리함이 하나 있다. 나라는 인생이 뿌리내리고 있던 한국으로부터 멀어져서인지 아니면 이 나라가 몇 백 배는 더 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감정이 소모될 일이 그다지 없다는 사실이다.
일적으로 봐도 그렇다. 훌륭한 법인장님과 둘이서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고, 한국에서처럼 수많은 관계 사이에 끼어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며 처신해야 하는 복잡한 환경이 아니다. 미국은 스몰톡의 나라답게 날씨, 스포츠, 정치 같은 주제로 가볍게 대화를 나누지만, 그 리액션의 크기에 비해 진짜 내밀한 감정이 투입되어야 하는 대화는 드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쾌적함의 뿌리를 알 것만 같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년이 채 안 되었기에, 아직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이 없던 것이다.
속 깊은 이야기로 들어가며 감정을 꺼내놓는 대화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감정적인 상황이 없는 이유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거리를 존중해 주는, 각자의 '퍼스널 버블(Personal Bubble)'을 지켜주는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 내가 한국에서 그리웠던 게 바로 이 문화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지점은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잠언 14:4)
보스턴이라는 내 구유는 깨끗하다. 마찰이 없는 삶은 깨끗하다. 누군가와 부딪힐 일도, 감정을 낭비할 일도, 기다림에 지칠 일도 없다. 하지만 마찰이 없다는 것은 동시에 무언가를 끌어올 힘(Traction)도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공동체적인 문화와 미국의 개인적인 문화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짬뽕' 같은 나는, 이 깨끗한 구유를 보며 묘한 결핍을 느낀다.
가까운 거리여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가족이나 연인 사이처럼 가까운 관계에서만 터져 나오는 날 것의 감정들, 쉽사리 꺼내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은 오직 '불편한 거리' 안에서만 교환된다. 직접적인 경험이 귀한 이유도 여기 있다. 내 피부로 느끼며 경험하는 마찰은 강렬히 체감될 뿐 아니라 쉽사리 잊혀지지도 않는다. 혹독한 다이어트 이후에 완전히 탈바꿈한 사람들에게 '인간 승리'라는 찬사를 보내는 것은 그들이 땀과 고통이라는 거친 마찰의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이 정의를 바꾸는 시대에는 이 숭고함의 기준마저 도마 위에 오른다. 우리가 먹방 유튜버의 '먹뱉'에 분노하는 것처럼, 혹은 프로 선수의 약물 사용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처럼, 인간 승리의 서사 뒤에 GLP-1이라는 증강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전과 같은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좋은 글을 읽으면서도 작가가 AI의 도움을 받았을지 의심하고 걱정해야 하는 시대다. 우리는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숭고한 마찰을 로망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처럼 모든 것이 증강되고 자동화되는 세상일수록 우리는 아무런 보조 장치 없이 오직 자신의 근육과 이성으로 버텨낸 그 순수함(Pureness)을 가장 높은 가치로 평가하게 되는 것만 같다. 그것이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인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행위는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반려견들에게 "기다려"를 훈련시킬 수는 있겠지만,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의 무게는 기술이 흉내 낼 수 없다. 기다림은 본능을 거스르는 고도의 의지이자 대상을 향한 존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기다릴 필요 없는 세상, 아니 기다림이 죄악시되는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다. 며칠, 몇 달을 기다려야 마음을 전할 수 있던 편지의 시대를 넘어 실시간 메시지의 시대가 온 지는 이미 오래다. 지식인에 내공을 걸고 누군가의 답변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대도 끝났다. 이제는 AI에게 질문을 던지면 엔터키를 누름과 동시에 답변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이제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길가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어플로 정확한 도착 시간을 확인하고 타이밍 맞춰 신발을 신는다.
기술은 앞으로도 우리 삶의 더 많은 기다림을, 그 불편한 마찰을 제거해 주며 영향력을 키워갈 것이다. 비만치료제가 식욕과의 마찰을 지워주듯 자본주의는 관계와 시간의 마찰을 지워준다.
우리가 끝내 무엇을 기다릴 수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