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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학사 Jul 07. 2022

마키아벨리 군주론(1)

피렌체 제2장관이 되다

1550년 판의 군주론 표지(출처 : 위키백과)




함정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겁주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출간 당시 온 유럽은 충격에 빠뜨렸다. 

군주론은 절대 권력을 얻기 위한 무자비한 책략을 옹호하고 전통적인 도덕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악마의 대리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오늘날에는 정치학을 철학과 신학에서 해방시킨 인본주의 완성차로 해석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악마의 대리인일까? 

아니면 인본주의자일까? 

그 답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전학사     


마키아벨리. 풀네임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지금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469년에 태어나서 1527년에 사망을 했습니다. 대단한 귀족 집안은 아니었지만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다이아몬드수저 수준은 안 되더라도 뭐 금수저 정도는 됐었습니다.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가 그린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초상(출처 : 위키백과)



마키아벨리는 금수저로 태어났는데 학문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유명한 학자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1448년 마키아벨리는 서른도 되지 않은 29세란 나이로 피렌체 제2장관이라고 하는 그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됐습니다.

      

제가 제2장관이라고 하면 제1장관은 누군가 궁금해하실 분들이 계실 텐데요. 제가 직전에 말씀드렸던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마키아벨리의 스승입니다. 한마디로 스승님이 마키아벨리가 똑똑하고 능력이 되니까. 서른이 않았어도 중책을 맡겼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권박사


그 서른이라고 하는 나이가 지금의 서른하고 좀 다른 느낌인 것 같아요.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길지 않았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한 쉰이 걸로 봐야지…. 아니, 그 오십 대는 너무 많은 것 같고, 뭐 서른 중반에서 마흔 정도라고 해서 이제 삶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그런 시기가 아니었을까요? 




전학사


네, 그렇게 생각이 되네요. 마키아벨리는 제2장관으로 주로 이제 외교 분야에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15세기 중반 그때가 대단히 그 국제적으로 혼란 시기였습니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유럽의 가장 강대국이었던 프랑스도 외교사절로 갔었고, 주변의 도시 국가와도 외교 활동을 활발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보면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인 29세에 피렌체의 이인자 제2장관까지 오를 수 있었냐를 알아보면, 원래 이탈리아 반도의 피렌체는 대대로 메디치(Medici)라는 유력 가문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메디치가는 상업과 은행업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피렌체 권력을 독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494년 프랑스 사를 8세의 공격으로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이 축출되었습니다. 



모레토 다 브레시아(Moretto da Brescia)가 상상하여 그린 사보나롤라의 초상화(출처 : wikipedia)


메디치 가문이 사라진 1494년 그해, 피렌체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름도 어렵습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저는 그냥 신부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분이 도미니크회 수도사였거든요. 이 신부님이 집권하시게 됐는데 신부님은 기존에 그 피렌체 사람들하고 너무 다른 그 정치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치를 해야 된다. 내 신이다.’ 이런 뭐 정치를 하다 보니까 이년 만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후 피에로 소데리니(Piero Soderini)이라고 하는 사람이 집권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그 직전에 그 신부님이 중용한 사람들을 다 제거가 됐기 때문에 기성 정치인들은 있었던 사람들은 쓸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주목받지 못했던 학계 출신의 사람들은 소데리니로부터 적극 기용되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소데리니의 제자 마키아벨리였습니다. 그렇게 마키아벨리는 1512년까지 그 피렌체에서 제2장관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전학사


1512년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메디치가(家)가 드디어 15년 만에 다시 피렌체의 등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메디치가의 경우는 그러면 기존에 권력을 가지고 있던 또 집단들을 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기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숙청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 마키아벨리도 숙청을 당합니다. 그리고 숙청을 당해서 낙향을 하게 되죠 그렇죠.




권박사


안 죽기 다행이죠.




전학사


그렇죠. 나중에 『군주론』 이야기할 때 자세히 말하겠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마키아벨리는 이런 상황에서는 죽여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본인은 숙청당했지만 죽지 않고 권력에서만 물러나서 낙향을 해서 쓴 책이 네 『군주론』입니다.




권박사


그렇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에서 축출당하는 가운데 공문도 많이 받았죠. 어떤 고문이었냐고 찾아보니, 두 팔을 어깨 뒤쪽으로 묶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니까, 왜 영화에서도 많이 나오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렇게 되니까 어깨가 다 탈골되고 그런 고문이었답니다.




전학사

아, 그 예전에는 정말 그 고문이나 인신구속, 말하자면 몸에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는 형벌이 정말 참혹했네요.




권박사


중세 때 고문기구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차마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죠.




전학사


그렇죠.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두대, 즉 '기요틴(guillotine)'이 있지 않습니다. 기요틴은 아주 심플해서 그래서 귀족들이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할 때 단숨에 죽이기 위해서 고안된 사형 기구가 기요틴이라고 하더라고요.


기요틴에서 참수당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출처 : 위키백과)




권박사


맞습니다. 혹시 그 얘기 듣는 분 중에 아실지 모르겠지만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을 보면 처음 시작한 장면이 국왕 시해범 다미엥(Damiens)에 대한 고문 대한 묘사가 아주 길게 이어집니다. 그 장면을 읽으면 얼마나 그때 그 고문이 심했는지 죽지 않게끔 고문을 가하면서 계속 고문을 이어갑니다. 살점을 다 뜯어내고 거기다가 유황으로 지지는 엄청난 고문 장면이 나옵니다.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마키아벨리의 고문 정도는 고문도 축에도 낄 수도 없겠죠. 그렇다고 해도 마키아벨리가 어깨가 비틀려 매달리는 순간 얼마나 아팠을까요? 고문 없는 세상이 와야 합니다.




전학사


권 박사님께서 푸코 이야기를 하시니까 제가 짧은 지식이지만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도 나오는 또 ‘파놉티콘(panopticon)’이라고 하는 또 감옥 있지 않습니까?



제러미 벤담의 고안한 파놉티콘 청사진(출처 : 위키백과)



권박사


네, 그 ‘파놉티콘’은 원래 그 공리주의자의 창시자라는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고안을 한 원형 감옥이죠. 판(pan)과 옵티콘(opticon)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인데, ‘판’은 모두 그리고 ‘옵티콘’은 본다는 뜻이죠. 그래서 원형 감시탑이 있는 감옥을 '판옵티콘'이라고 부르죠. 푸코는 ‘파놉티콘’에서 테마를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전학사


여러분들이 ‘파놉티콘’이 무엇인지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지금 교도소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제가 이 ‘파놉티콘’ 형태를 실제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봤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에 보존된 옛 수용시설의 안내판에 ‘파놉티콘’ 형태로 설계되어있다는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권학사


제가 8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는데 사실 그때 데모하다가 여러 번 잡혔어요. 어느 경찰서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때 딱 반원형 유치장이었어요. 그래서 중앙에 간수가 있으면 모든 유치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한눈에 다 볼 수가 있었죠. 제가 그로부터 훨씬 뒤에 이제 푸코의 『감시와 처벌』 를 읽었지만 ‘파놉티콘’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게 그 경찰서의 유치장이었어요.




전학사


아 그런데, 낙향하거나 유배 가서 학문적인 성과를 올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권박사


아주 많지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분이 정약용 선생님이죠. 정약용 선생님 귀양살이가 엄청나게 길었죠. 18년 간 귀양살이를 하셨죠. 처음에 강진에 갔다가 다음에는 제주도로 가셨죠.


안경을 쓴 정약용 초상화(출처 : 다산박물관 홈페이지)




전학사


그래도 학문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어쩔 수 없나 봐요 그렇죠. 정약용 선생님도 귀향지에서 엄청난 저작들이 만드셨죠. 고문을 당하고 귀향지로 유배 가서 역사상 손꼽히는 저작을 만드신 분이 동양에 또 한 분이 계십니다.




권박사


네, 사마천(司馬遷)을 말씀하시는 거네요. 사마천은 궁형(宮刑)을 당했죠.


사마천 초상화(출처 : 위키백과)




전학사


궁형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남성성을 제거당하는 형벌이죠.




권박사


거세를 하는 형벌이죠.




전학사


권박님이 너무 또 직접적으로 말씀하셔서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사마천은 전한(前漢) 때 사람인데 흉노족에 부득이하게 투항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그의 나이 48세에 치욕스러운 궁형을 받았습니다. 사마천은 옥중에서 그리고 낙향해서도 그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시작한 역사서 집필 작업을 계속했고 마침내 동양사를 넘어 세계사에 빛나는 역사서 『사기』를 집필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에 태어나서 1527년에 사망을 하셨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 시대 한반도에는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때 당시 군주가 누구였냐면 조선 10대 군주 연산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는 연산군은 폭군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장녹수와의 관계가 많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기록상 장녹수는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는데 각종 트라우마로 뒤틀린 연산군의 마음을 홀려서 호가호위하면서 뒤에서 모략을 많이 했다고 하죠. 민심을 잃은 연산군 시대는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중종의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중종 하면 또 떠오르는 또 인물 있지 않습니까?




권박사


있지요. 조광조(趙光祖)입니다. 전학사께서 마키아벨리 등장 전 피렌체의 집권자 사보나롤라 말씀하셨는데, 그때 제가 딱 조광조가 떠올랐습니다. 사보나롤라는 기독교 이론을 바탕으로 한 엄청난 개혁파라는 의미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닮아있습니다. 이 시대와 어울리기 어려운 개혁성 때문에 사보나롤라와 조광조는 실패했고, 그를 따르는 무리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1750년 정홍래 작 조광조 영정(출처 : 위키백과)




전학사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가 속한 사림 세력이 숙청된 기묘사화를 말씀하시네요. 조선에는 연산군 때 무오사화, 갑자사화, 그리고 중종 때 기묘사화, 마지막으로 명종 때 을사사화 이렇게 ‘4대 사화’가 있었습니다. 아니러니 한 것은 사화의 피해자는 분명 사림 세력인데, 이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 세력은 더 공고해지고 조선시대 중기 이후부터는 사림 세력이 완전히 권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세계사 이야기하면서 중국을 빼놓은 안되지 않습니까? 당시는 중국의 왕조는 명나라였습니다. 명 효종 홍치제(弘治帝) 시절인데, 홍치제는 명나라의 가장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홍치제를 이야기할 때 재미있는 부분이, 어쩌면 우리가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제주도에서 표류하다 명나라까지 가게 된 최부(崔溥) 라는 사람이 중국을 여행하면서 『표해록(漂海錄)』이라는 여행기를 지었습니다.


최부는 황제 홍치제를 알현하기까지 했는데, 특히 명나라의 대운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당시 대운하가 얼마나 대단하냐면 스마트폰 꺼내셔서 중국 지도 한번 켜보시면 압니다. 운하를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에서부터 남쪽의 상업도시 항저우까지 연결시켰습니다. 이 대운하가 명나라의 상공업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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