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통일을 꿈꾼, 마키아벨리
전학사
다시 유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때 유럽은 대단히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금방 감이 오실 것 같습니다. 1517년이 루터가 95개 조의 의견서를 제시하면서 종교혁명이 일어난 해입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은 가톨릭 대해서 종교적 모순들이나 반대로 종교의 권위가 극대화돼 있었던 그런 시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 제가 처음에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해서 이탈리아가 지금 기준의 이탈리아로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오해입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니다. 그때 당시에 이탈리아 반도는 그 많은 숫자의 도시국가와 교황이 다스리고 있는 교황령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권박사
또 공국이라고 많이 있었죠,
전학사
저는 공국, 또는 공화국 헷갈렸습니다. 공국이 뭐지 공화국이 뭐지, 그리고 후국도 있고요.
권박사
헷갈릴 수 있지요.
전학사
당시 독일에도 공국이라는 개념이 많이 나와서 제가 사전에 찾아봤어요, 공국(公國)은 공작의 나라
권박사
네 영어로 principality라고 하죠.
전학사
다음으로 대한민국은 공화국이 아닙니까? 군주가 없는 국가를 공화국(共和國)이고 부릅니다. 피렌체도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공화국이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엄청 분열돼 있었습니다. 전쟁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탈리아가 분열되고 피렌체가 도시국가로 남아 있었던 이유는 이탈리아의 지정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계지도를 펴서 이탈리아를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지중해의 중간에 딱 붙어 있잖아요.
권박사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서 간의 교역로의 중심이었어요.
전학사
그래서 장사를 통해 막대한 도시의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굳이 통일국가를 만드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이 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로마가 있지 않았습니까? 로마가 동서 로마로 나뉘고 서로마는 또 멸망을 하고 그다음에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천년이 지나서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때 당시 이탈리아는 분열돼 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군주론』 본문을 이야기할 때 좀 더 이야기해야 되겠지만,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가 통일이 돼야 된다 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빨리 통일을 해서 합쳐져서 과거 로마와 같은 국가로 만들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으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로마 역사에 대해서도 깊이도 연구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마키아벨리가 찬란했던 로마 역사를 연구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통일이 금방 됐을까요? 마키아벨리 살아생전에 당연히 안 돼 안 됐죠. 그리고 300년이 이라는 세월이 지나 여러분들 잘 아시는 분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이 등장합니다. 나폴레옹 하면 작은 키라는 신체적인 특징이나, 또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동명의 양주 이름으로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텐데, 나폴레옹 등장은 유럽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혼란에 빠진 프랑스를 수습하고 유럽의 국가들을 하나씩 정복해 갔습니다. 이 정복 과정에서 유럽 각국에 민족주의를 잉태시켰고, 이후 민족국가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역사학자들이 평가를 합니다.
민족 통일 국가가 만들어진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하고 이탈리아입니다. 이탈리아 통일이 독일보다 조금 늦었는데 19세기 후반에야 완성이 됩니다
권박사
그다음에 민족주의에 대해선 할 기회가 있으면 더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이때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한국에서 보통 생각하는 민족주의하고는 조금 다르지요. 우리는 민족 하면 같은 혈통으로 생각하지만 영어로 nation state라고 하죠. 이것은 어떤 피가 동일한 집단이 모여서 나라를 만든다는 개념보다는 조금 더 넓은 개념이죠.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이견이 있어요. 학자를 보통은 나폴레옹의 활동과 함께 민족주의가 전개되기 시작하고 민족국가, 다른 말로 국민국가가 사실은 더 맞는 말씀인데 국민국가 형성이 되었다고 보죠, 또 다른 설도 많아요.
전학사
그런 것 같아요. 뭔가 국민국가, 민족국가는 외세의 침략 등 자극이 있어야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쉽게 그렇게 내부에서 발생되거나 하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않을까요?
권박사
그렇죠. 그 이야기는 『상상의 공동체』 등 민족주의에 관한 유명한 제작도 꽤 많죠. 그러니까 그때 다시 한번 이야기해보기로 하죠.
전학사
이번에는 메디치(Medici) 가문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말씀드렸다시피 마키아벨리가 활동했던 피렌체에서 상공업을 통해 재산을 많이 축적을 해서 권력을 획득한 가문입니다.
권박사
그리고 이때 당시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중심지였어요.
전학사
그렇습니다. 메디치 가문 특히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리는 메디치 데 로렌초 가 집권할 당시에 막대하게 그 축적된 부와 권력을 통해 예술가들을 많이 지원해줬는데, 르네상스 미술을 꽃피우는 선순환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르네상스 미술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도나텔로 도 이때 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이걸 네 명 이름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름은 아느냐, 또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닌자거북이’라고 하는 영어 원제는 ‘Teenage Mutant Ninja Turtles’이라는 인기 애니메이션이 있었어요. 거기 나오는 그 주인공 거북이 이름이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도나텔로 였습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어떻게 미술들을 지원을 해주었냐면은, 그때 당시만 해도 미술가들이 지금과 같이 자유롭게 영감에 따라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이 들어오면 그려내는 장인 시스템과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미술가는 성당의 벽화를 그려주고 돈 받아서 예술 활동을 이어 나가야 하니 피렌체 가문과 같은 부유한 가문의 후원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피렌체는 왕이 없는 공화국이라고 해도. 메디치 가문이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 권력을 사실상 독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피렌체 가문이 잠시 실각했을 때, 권력을 잡은 사람이 사보나롤라,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스승 소데리니 등이었죠. 그런데 피렌체 가보셨어요?
권박사
아니요.
전학사
그럼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하는 영화는 보셨나요?
권박사
아니요. <무릎과 무릎 사이>라는 영화는 보았습니다.
전학사
<무릎과 무릎 사이>는 80년대 한국에서 여대생의 성 해방을 부르짖었던 영화 아닙니까? 저희 대화가 점점 성적으로 자극되는 것 같아서, 방향을 다시 틀어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일본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서정적인 러브스토리라서 여성분들 중에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 사랑 이야기의 배경이 피렌체입니다.
권박사
그렇군요.
전학사
피렌체의 랜드마크가 ‘피렌체의 두오모(Duomo)’ 정식 명칭으로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입니다. 두오모는 세계에서 규모가 네 번째로 큰 성당인데, 아름다운 돔(dome)이 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을 만큼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두오모가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약속하고, 이별한 후 재회하는 장소로 나오는데 그 영상미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듭니다. 왜 길게 영화 <냉전과 열정 사이>를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분들이 계실텐데, 이 두오모가 마키아벨리가 활동하던 시대 바로 직전인 1439년에 200년간 공사를 거쳐 완성됐습니다. 그래서 혹시 피렌체의 여행을 가신 분들 있으시다면, 『군주론』이 또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이 되는 두오모를 알고 방문하시면 좀 더 그 여행이 풍성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씀드렸습니다.
전학사
제가 지금까지 마키아벨리가 활동하던 시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권 박사님께서 이 시대에서 대해서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권박사
글쎄요, 아무래도 이 시기에 르네상스가 한창이었습니다. 보통 르네상스를 초기 근대 즉, Early modern period로 구분합니다. 이 시기는 서양 역사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전학사께서 말씀하셨지만 종교개혁이 서서히 시작되었고, 중세 동안 흩어진 권력들이, 중세 때는 왕권이 굉장히 약했습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절 언저리부터 점점 중앙집권화로 전환하는 시기였습니다.
전학사
굉장한 혼돈의 시대를 앞두고 있는 시대인 듯합니다. 폭풍 전야의 시기라고 할까? 이 시대 전시대가 중세인데, 중세를 서양사에서 암흑기라고도 합니다. 최근에는 그렇게 암울한 시대가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 암흑시대라고 표현한 것은 어쩌면 중세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신학이라는 학문이, 인간으로서 넘어설 수 없는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신의 뜻에 복종하며 살았고, 신의 의지 안에서 인간의 행동들을 해석해야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정신이 인본주의지 않습니까? 르네상스 시대로 오면서 시선이 신에서 인간으로 왔고, 이런 사상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 시대는 그 이전의 중세하고 완전히 다른 대가 될 수 있었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권박사
『중세의 가을』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14세기부터 15세기 프랑스, 네덜란드의 생활양식은 르네상스의 싹을 보여주기보다는 중세의 종말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을’은 열매가 맺히는 절정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곧이어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겨울을 맞이하는 계절이기도 하니까요. 중세라는 ‘middle age’라는 개념이 원래 복잡해요. ‘중세의 가을’이라는 표현을 빌린다면,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계절은 ‘중세의 겨울’ 쯤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전학사
어쩌면 ‘근대의 봄’이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어떤 학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근대를 열렸다고까지 하기도 합니다. 마키아벨리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