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신지 않은 아기 신발 나눠요
방 안은 고요했다.
창밖엔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방 안의 공기는 아직 겨울 끝자락처럼 차분했다.
예린은 작은 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하늘색 리본으로 묶인, 작고 귀여운 신발 한 켤레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도 신겨지지 않은, 깨끗한 아기 신발이었다.
"당신, 이거…"
지후가 예린 옆에 앉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눠주자.
이 신발도 너무 오래 기다리기만 했잖아. 난… 더 못 기다릴 것 같아."
벌써 세 번째 유산,
이제 더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지후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정말 예쁜 신발이니까… 분명 누군가에게 잘 어울릴 거야."
그 날 밤.
<한 번도 신지 않은 아기 신발 나눠요.>라는 손글씨 메모가 쓰여진 탁자 위 상자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커지더니, 방 안을 따스하게 감쌌다.
그 틈을 타 신발이 '톡' 하고 상자 밖으로 굴러 나왔다.
아주 작고 조용한…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을거야."
신발이 바닥에 '툭' 떨어지자,
세상은 조용히 흔들리듯 변했다.
어느새 주위는 부드러운 구름과 햇살로 가득한 하늘 위.
사방이 포근한 바람으로 감싸져 있었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작은 발소리들.
"어… 어라?"
신발은 깜짝 놀라 좌우를 살폈다.
작은 몸으로 뒤뚱뒤뚱 걸어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그때, 구름 한가운데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여긴 '아기들이 태어나기 전, 머무는 곳'이야."
"넌 이제 너의 발을 찾으러 가야 해."
"내… 발?"
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딱 맞는 아이.
네 마음에 맞는, 따뜻한 발을 찾아야지."
신발은 작게 떨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찾아?"
"천천히, 하나씩 만나다 보면 알게 될 거야."
"가장 잘 맞는 발은, 네가 먼저 알아보게 될 테니까."
망설임과 두려움에 몸이 움츠려 들었지만,
신발은 가만히 자신의 끈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나는 꼭 내 발을 만나고 싶어."
신발은 조심스럽게 폭신한 구름 위로 첫 발을 디뎠다.
'내 발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 작은 신발의 여행이 시작된다.
신발은 하늘나라의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구름은 새하얀 양탄자처럼 발밑에서 살랑였고,
아득한 어딘가에서 오르골처럼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에 기묘한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수천 개의 서랍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도서관'이었다.
"여긴… 뭐지?"
작은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발 도서관 – 아이들 소망의 발자취〉
신발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각 서랍 안에는 작은 메모지들이 담겨 있었고,
메모지들에는 아이들이 이 세상에 오기 전 자신에 대해 남긴 말들과 발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개미를 좋아하는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이유는… 작아서 귀여우니까요."
"나는 조용한 아이가 되고 싶어요. 하지만 노래를 부를 땐, 아주 크게요."
"나는 잘 울어요. 하지만 잘 웃기도 해요. 괜찮죠?"
신발은 메모지들에 찍힌 발도장들을 바라보며,
문득 자신은 어떤 발을 찾고 싶은지 묻게 되었다.
'나는… 어떤 아이의 발을 원하지?'
'예쁜 발? 잘 걷는 발? 아니면… 따뜻한 발?'
그 순간, 도서관 안쪽에서 작고 반짝이는 빛이 깜빡이며 신발을 불렀다.
"이쪽으로 와봐."
신발은 빛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곳엔 커다란 거울 하나가 있었다.
'기억의 거울' -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기억을 비춰주는 마법의 거울이었다.
신발이 거울 앞에 섰을 때,
거울 속에는 두 손이 조심스럽게 리본을 묶는 장면이 나타났다.
예린이었다.
그녀는 작은 신발을 무릎에 올려두고, 예쁘게 리본을 묶고 있었다.
그 옆엔 지후가 예린이의 배를 어루만지며 앉아 있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작은 신발을 보며 말했다.
"이 신발, 정말 우리 아기에게 딱일거야.
그치?
그 아이도 분명 우리에게 오길 기다리고 있을거야."
신발은 조용히 거울 앞에서 속삭였다.
"내가… 그 아이를 찾아갈게요.
그 아이를 만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게요."
리본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마치 함께 다짐을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거울 뒤편에 커다란 문 하나가 천천히 열렸다.
그 문 너머,
'만남의 숲'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억의 거울' 뒤편,
신발 앞에 펼쳐진 숲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빛이 부서지는 듯한 나뭇잎,
투명하게 반짝이는 꽃잎들,
숨결처럼 살아 움직이는 나무들.
신발은 조금 두려웠지만,
아까 봤던 예린과 지후와의 기억이 마음 깊이 남아 있었다.
"내 발을 찾아야 해."
"그 아이는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때, 사르륵- 바람이 불며
구름 잎 하나가 발등에 닿았다.
구름 잎에는 조그마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처음 만날 아이는, 웃음이 특별해요.
웃음 속에 마음이 숨겨져 있어요."
신발은 살짝 떨며 숲속으로 발을 들였다.
잠시 후,
한 아이 영혼이 뛰어왔다.
통통한 볼, 눈웃음이 예쁜 아이였다.
"안녕! 너 신발이지? 반가워~
나 진짜 신발 한 번도 신어본 적 없어! 신겨줘! 신겨줘!"
신발은 깜짝 놀라면서도 웃음이 났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방울처럼 맑고, 깡충깡충 뛰는 모습이 귀여웠다.
신발은 아이 앞에 다가가 조심스레 발에 신겨졌다.
처음으로 닿은 발의 느낌은 살짝 간지러웠지만,
이제 나도 내 발을 찾았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몰려왔다.
"오! 잘 맞는 것 같은데?!"
아이의 발은 예뻤고, 걸음도 경쾌했다.
조금 지나자 아이는 여기저기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가 신발을 벗으려 했다.
“나 신발 신는 거 불편해. 그냥 맨발로 놀고 싶어. 안녕!”
그리고선 아이는 퐁당- 하고 나뭇잎 위를 점프해 사라졌다.
신발은 조용히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당황스럽기도 했고, 자기가 무얼 잘 못 했는지 걱정도 되었다.
“이제, 나…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난 불편한 신발인가?”
그때, 숲 너머 어딘가에서
은은한 종소리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단다. 네게 맞는 발을 가진 아이가 있을거야.'
신발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숲의 나뭇잎이 흔들리며 길을 만들었고,
신발은 다시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만남의 숲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자,
풍경은 조금 달라졌다.
환한 빛 대신, 안개 같은 푸른 기운이 가늘게 깔려 있었고
바람은 조용히 나뭇잎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신발은 잠시 멈춰 서서,
조심스레 리본을 고쳐 묶었다.
첫 번째 아이는 밝고 사랑스러웠지만,
'나의 발'은 아니었다.
"괜찮아…
길은 아직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 순간,
숲의 틈 사이에서 작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말이 없는 아이.
고개는 숙였지만, 그 눈빛은 깊었다.
아이 영혼은 천천히 신발 앞에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나와 함께 있어 줄거니?"
신발은 말없이 아이 곁에 다가갔다.
아이의 발은 조금 작았고,
어딘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신발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발에 다가가 앉았다.
이번에는 바로 신기지는 않았다.
그저, 아이의 발 옆에 조용히 머물렀다.
아이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발의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었다.
신발은 조금 더 아이의 발에 기대었다.
아이의 발을 따뜻하게 감싸주어 아이를 보호하고 싶었다.
아이의 아픔을 함께 품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처음 만남 때문인지,
자꾸만 망설여지는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아주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이 아이는 기억할 거야.
너를, 너의 따뜻함을.
하지만… 이 아이의 길은 너와는 다르단다."
신발은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아주 조용히 말했다.
"너를 품어주지 못해 미안해.
너와 함께 해줄 수 있는 신발이 꼭 나타날거야."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함께 있어 주어 고마웠어.'
신발이 다시 길을 나섰을 때,
숲속에서 새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흐리던 길이
햇살로 부드럽게 물들고 있었다.
바람이 이번엔 조금 다르게 속삭였다.
"끝까지 가보렴.
거기엔 너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발이 있을거야."
숲의 깊은 곳.
이번엔 부드러운 바람 대신,
바람결마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신발은 발끝을 다듬었다.
먼지도 털고, 리본도 정리하고.
"이번엔… 느낌이 달라."
그리고 그 순간,
그 아이가 나타났다.
긴 속눈썹.
자신감 있는 걸음.
말하지 않아도 빛이 나는 아이.
아이 영혼은 유려하게 신발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익숙한 듯, 신발을 들어 발에 신었다.
척-
놀랍도록 딱 맞았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부터 그 아이의 것이었던 것처럼.
"딱이네.
이거면 뭐, 충분하겠지."
아이의 말투는 당당했고,
신발은 어리둥절했다.
"아… 어?
근데… 우리 인사 할까?"
신발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아이의 귀엔 닿지 않는 듯했다.
"이걸 신으면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을 거야.
앞서가고, 빛나고, 나만의 길을 만들 수 있어."
신발은 가만히,
아이의 발 아래에서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딱 맞는 발인데, 바로 아 아이가 그 아이일거야."
아이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이 신발, 진짜 특별해.
이걸로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되면
모두가 부러워하겠지."
하지만 신발은 자꾸만 속이 간질거렸다.
맞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아이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신발은 조금씩 삐걱거렸다.
리본이 헐겁게 풀렸고,
굽이 살짝 뒤틀렸다.
'몸은 맞는데, 마음은 안 맞아…'
그러다 아이가 말했다.
"이제 가자.
내가 널 어디든 데려가 줄게."
그 순간,
신발은 스스로 끈을 풀어냈다.
발에서 조용히 빠져나오며
잔잔하게 말했다.
"미안해.
넌 빛나는 아이야.
하지만 난… 함께 걷는 걸 좋아해."
아이 영혼은 놀라며 말했다.
"그래? 나는 내 갈 길을 가고 싶어.
넌 그냥 나를 따라오는 신발일 뿐이잖아."
신발은 미소 지었다.
"맞아.
난 발을 따라 가야해.
그래서 더욱더 어디로 가는지,
누구와 걷는지가 중요한 신발이야."
신발은 아이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다시 숲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햇살은 고요했고,
바람은 조용히 등을 밀어주었다.
‘이제야 조금,
내가 어떤 발을 찾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아.’
숲의 가장 깊은 곳.
아무도 발을 디디지 않은 땅.
하늘은 연하고, 바람은 말없이 감돌았다.
신발은 조용히 걸었다.
조금은 지치고, 조금은 맑아진 마음으로.
"여긴 아무도 없는 걸까?"
그 순간,
나뭇잎 사이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신발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작은 영혼 하나가 앉아 있었다.
작고, 조용하고, 아주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아이는 신발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바닥을 쓰다듬고 있었다.
신발은 다가갔다.
말없이, 천천히.
리본은 부드럽게 흔들렸다.
"안녕…"
작은 목소리.
신발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이 영혼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엔 부드러운 바람이 담겨 있었다.
"안녕,
너 참 예쁜 신발이구나."
그 말에
신발의 밑창이 따뜻해졌다.
"여기서 오래 기다렸니?"
신발이 물었다.
아이는 조용히 웃었다.
"글세. 꽤 오래 기다리긴 했는데.
근데… 언젠가 누군가
'나와 함께' 걸어줄 것 같아서… 괜찮았어."
신발은 다가가
아이의 발 앞에 살짝 놓였다.
"신어 볼래?"
아이는 망설였다.
"나한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어…"
"괜찮아.
난 많은 발들을 만났거든.
처음부터 서로에게 딱 맞는 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서로를 정말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면,
마치 선물처럼 꼭 맞는 느낌이 들거라 믿어."
아이는 천천히 발을 내밀었다.
신발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발에 안겼다.
딱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꼭 맞았다.
리본이 스스로 묶였고,
신발 안쪽에서 작은 빛이 피어올랐다.
그 순간,
하늘에서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렸다.
"이제야 만나네. 오래 기다렸단다."
신발도, 아이도
서로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그때, 숲 위에서 작은 별빛 하나가 떨어졌다.
별빛은 아이의 머리 위로 내려와
작은 왕관처럼 반짝였다.
따스한 봄 햇살.
작은 거실,
흰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들었다.
부부는
작은 신발을 꺼냈다.
아기 발이 웃고 있었다.
살짝 말린 발가락,
작고 포근한 살결.
예린이 말했다.
"그때,
이 신발 나눔하지 않길 참 잘했어."
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아기 발에 조심스럽게 신겼다.
딱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꼭 맞았다.
그 순간,
아기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작은 입술 사이로 미소가 번졌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