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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희 Jun 13. 2024

[YEAR에세이] 이탈

스물넷에 대한 기록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그 시작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꼬여버린 기분이다. 쉼 없이 달려온 게 문제였을 테지. 사실 이리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파노라마처럼 복선 같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올 초가 되자마자 나는 완전히 소진되었다. 무기력에 압도되는, 실은 익숙한 감각이었다. 2022년 송도에서의 나는 인생에서 한 번도 열심히 살아본 적 없었던 사람처럼, 마치 그 방법을 완전히 잊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너 원래 이렇지 않았잖아, 하며 다시 불씨를 살려보려 해도 마음의 온도는 발화점에 한참 못 미쳤다.

글쓰기가 유일한 도피처였다. 우연히 닿은 프리랜서 작가 일로 게임과 웹툰의 시나리오를 쓰며 공상에 불과했던 활자들이 세상에 가닿는 게 재밌었다. 종종 있던 의뢰인과의 트러블은 학교생활에 비해 기꺼이 참을만했다.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사람이 적어 마음이 편하다던 송도의 텅 빈 길거리는 마음만 더 헛헛하게 할 뿐이었다. 38층 원룸에 살던 그 시기, 밤을 새우고 한참 해돋이를 본 적이 있었다. 출근길 북적이는 차들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참고 살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싫은 것은 전부 하기 싫어진 내게 그들은 위인만큼이나 대단해 보였다. 누구라도 교류하고 싶지만 누구와도 교류하고 싶지 않았던 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렇게 독을 품은 나는 2023년 성적장학금을 받고 지금의 학교에 입학했다.



"100? 난 200, 500 할 수 있는데 왜 그만큼만 해?" 입시 때부터 발화된 열정은 2023년까지 이어졌다. 나는 내가 맞는 줄 알았다. 오히려 열심히 하지 않는, 소위 ‘적당히’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패기와 독기는 2024년의 나를 몸 져 눕혔다. 3주를 꼼짝 않고 누워만 있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 살만했다. 그러다 누워있는 내가 싫어져 훌훌 털고 일어나 버렸다. 아니 일어난 줄로만 알았다. 금세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번아웃이었지만 그건 내 바람이었을 뿐이었다. 5월이 되면서 과호흡이 찾아왔고 새롭게 진행하던 목표인 다이어트와 운동, 보컬 레슨 등 모든 구체적인 목표를 올 스톱했다. 감기처럼 다 낫고 나면 한동안 안 오는 건 줄 알았는데… 애써 지켜 온 루틴들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과호흡만큼이나 성가시고 괴로웠다.  

사실 두 번째 번아웃도 예견된 것이었다. 보컬 레슨을 시작하며 진지하게 음악을 바라보다 보니, 목 관리를 위해 틈만 나면 노래를 부르짖던 습관을 고쳤다. 자꾸 음악을 들으며 분석하게 되니 음악도 덜 듣게 되었다. 작년 한 해 친했던 친구들도 각자만의 사정으로 바빠지니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식단을 위해 먹거리를 제한했다. 그 와중에 학교 수업, 과제, 운동, 요리, 보컬 연습, 보컬 레슨으로 가득 찬 일주일을 보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준희 학생은 걱정이 너무 많아요. 걱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데.” 평소 친분이 두터운 교수님께서 우연찮게 내 이야기를 하신 걸 친구가 전해주었다. 지금은 그나마 감정 기복도, 과한 반추 사고도 많이 줄어든 편이지만 여전히 나는 생각과 걱정이 많다. 오죽하면 최근 독서모임에서 내 글을 합평하던 도중 어떤 분은 내가 위험해 보인다는 감상을 전하셨다. 사적으로 이야길 주고받거나, 많은 글을 보여드린 건 아니었지만 나는 왜인지 그 말을 듣자마자 완전히 납득했다.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춰야 했다.

 "준희 씨가 행복했던 기억들, 안정됐던 순간들에 집중해 보세요." 우울의 빈도가 잦아진 나에게 상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글쎄, 안정됐던 기억. 그게 언제였지 하며 곱씹다가, 상담하러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던 방금 전이 떠올랐다. 그리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뜨개질을 하던 이른 아침, 책을 읽으며 일광욕하던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집을 청소하던 기억, 좋아하는 카페에서 집중해서 글을 쓰던 순간, 기분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잠자리에 들었던 밤까지. 꼽아보니 많았다.
 
그 순간들은 어떤 때였던 것 같냐는 질문에 가만 생각하니, 이 모든 순간에는 ‘나에게로의 집중’이 있다고 말씀을 해주셨다.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돌보던 순간. 이 기억들은 모두 ‘돌봄’과 관련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나를 돌보고 있지 않았다. 내 삶에는 해야만 한다는 강박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아? 흐르는 대로 살아, 준희야." 흐르는 대로 사는 게 어떤 거냐고 묻자 엄마는 포인트 있게 사는 거란다.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을 하지 말고 강약을 두고 한두 가지만 하라고, 단순하게 살라는 게 요지였다.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나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팔자대로 살라며 엄마는 다그쳤다. 그 따가운 일침을 들으니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개운했다.

그 주 주말 나는 어딘가로 떠나기로 했다. 번아웃이 온 직장인에게 가깝지만 아는 곳으로 떠나라는 김영하 작가님의 조언을 참고했다. 모든 과제를 마치고 가벼운 짐을 꾸린 뒤, 늦은 점심쯤 지하철에 올랐다. 인생을 맥시멀리스트로 살아온 내가 꾸린 짐 중 가장 간소했다. 놀러 갈 때 보면 좋을 것 같아 전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던 만화책, 요즘하고 있는 뜨개질의 샛노란 실뭉치, 떠나기 전까지 찾았지만 찾지 못한 블루투스 이어폰, 다음 주 과제를 위한 맥북. 챙기고 싶은 것들은 많았지만 모두 두고 왔다. 그 외에도 집에 두고 온 건 많은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이 감각이 무척 좋았다.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매사 두고 간 게 무엇일까 고민하고 불안해했는데, 처음으로 두고 온 이 기분이 통쾌했다. 더 두고 올 걸 그랬나, 이러다가 알몸으로 가는 거 아냐 속으로 쿡쿡 웃으며 가는 2시간을 온몸으로 음미했다.

나는 아마 이곳의 무언가가 그리웠던 걸까, 혹은 두고 갔던 걸까. 송도에 도착하고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이 행복에 겨웠다. 여행자로서 오는 게 아니라면 오랫동안 발도 들이지 않겠다던, 내가 송도에서 쓴 마지막 글을 다시 보았다. 여행자 신분에서 마주한 송도는 쾌적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공허해 보이던 텅 빈 길거리는 숨 막힐 정도로 바글바글한 서울과 달리 여유 있어 보였다. 고층 전망에서 바라본 전경은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어디도 소속되지 않는 기쁨. 이젠 나와 관련이 없지만 한편으로 가장 잘 아는 곳. 어디든 떠나도 아는 길, 정겨운, 추억 어린 길. 이 믿음이 퍽 의지할 만하고 불편함이 없었다. 온전히 내 마음대로 음미할 수 있는 이 자유가 행복했다. 오랜만이었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할 정도로 편안하고 행복했다.

일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 뭉클함이 찾아왔다. 공대 생활에 지쳐 예술 학교 입시를 결심하고 준비하며 마음이 복잡하던 나날들. 그로부터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완전히 상황이 달라진 것이 신기하고 오묘했다. 2022년 좌절과 단념이 자리했던 송도의 거리, 당시 지독한 기록벽으로 구경을 하러 가서도 즐기지 못했던 인근 차이나타운, 월미도를 다시 살폈다. 그때의 나는 뭐가 그토록 간절했을까. 나는 그 간절함에 빚지지 않고 잘 살고 있던 걸까. 이곳은 달라진 게 없었다. 활발한 호객행위 사이로 탕후루와 샤오룽바오를 파는 차이나타운의 길거리도, 뺙뺙 거리며 돌아다니는 월미도의 장난감 강아지도, 시끄러운 트로트 노랫소리도, 잔잔히 빛나는 에메랄드빛 바다의 윤슬도. 달라진 건 나뿐이었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또다시 매여서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이곳에 내 모든 굴레를 두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2022년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간구하던 행복의 기도를 들어주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일주일 전 독서모임 뒤풀이에서 모임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던 게 생각났다. 나와 같은 번아웃을 앓고 있던 모임장님은 다음 시즌의 독서모임을 고민 중이셨다. 쉬시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이젠 나만의 모임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 같다며 책임감을 느낀다고 하셨다. 나라도 고민되었을 것 같았지만 무언가 한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 누구도 나만큼 나를 신경 써줄 수 없다고, 어떤 선택을 하든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우선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는 진심으로 모임장님께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지금 보니 전하려던 대상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매년 쓰고 있는 나이에 대한 수필은 이로써 다섯 번째가 되었다. 작년의 나는 '마침내 러너스 하이'라는 제목의 수필로 스물세 살의 나를 기록했다. 치열했던 달리기를 뒤로하고, 스물네 살의 나는 이 트랙의 이탈을 결심했다. 나는 지금 달리지 않을 것이다. 무작정 달리는 일이, 멈춰 서는 것보다 나쁠 수 있음을 알았다.
나의 이탈은 복귀다. 나는 나로 복귀한다. 그 어떤 관계, 지위 속의 '나'가 아니라 인간 김준희의 삶을 꺼내주려 한다. 숱하게 쌓인 must들 사이로 착복해 왔던 나를 놓아주겠다.

끝으로 지쳐있는 나를 안쓰러워하시던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의 조언을 인용하며 글을 닫는다.

"나는 인생을 마라톤으로 비유하는 사람들이 싫어요. 마라톤 코스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달리는 사람들은 그걸 못 본대요. 앞사람보다 앞서려고 달려가느라 바빠서. 인생이 왜 마라톤이에요. 잠깐 쉬기도 하고 슬금슬금 걷다가 주변 풍경도 볼 수 있죠. 그러다 뛸 준비가 되면 다시 뛰기도 하는 거예요. 인생은 계속 달리면 안 돼요."


24.06.02.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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