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의 언니가 되다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게 된다. 동물을 키우는 일. 이렇게 쓰고 보니 '그러게..! 왜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한 번쯤 동물을 기르고 싶어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요즘은 외로움에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의 그러한 감정이 '외로워서'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면... 호기심이었을까?
어릴 적에 키워본 동물이라 하면, 80년 대생들에겐 반드시 3순위 안에 드는 것이 병아리가 아닐까 한다. 나 역시 교문 앞 종이 박스에 담겨 한 마리에 몇백 원씩 팔리던 병아리를 샀던 듯하다. 이후로 의도치 않게 우리 집에 새가 날아들어, 지금은 종류도 기억나지 않는 그 새를 키워봤고, 집게 달린 갑각류..(이름이 뭔지 몰라..)도 키웠었다. 나름 반려동물이라는 것이 허용된 가정이었지만 '반려견' 그러니까 그때 말로 '애완견'은 그림의 떡이었다. 10대의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강아지를 키우자고 엄마에게 몇 번 떼를 써보기는 했다. 그때마다 아마도 엄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고.
“시집가서 네가 키워라.”
그러나 반전이! 내가 시집가기 전에 우리 집은 반려견을 키우게 됐다. 그것도 가장 반대하셨던 엄마의 주도로 말이다. 엄마 특유의 추진력으로 몇 달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보고 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부하셨고 그렇게 초코는 우리 식구가 되었다.
초코는 삼촌댁 강아지가 낳은 새끼 2마리 중 한 마리였다. 아기 때부터 한 성깔(?)하는 성향이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초코의 그런 점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셨다.(^^;) 한동안 타지 생활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초코를 봤을 때는 정말 신기했다. 우리 집에 강아지가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동물의 생김새를 이토록 가까이서 오랫동안 바라본 것이 처음이라 신기했다. 입술이 까맣고, 발바닥도 까만데 폭신폭신하고, 털 색깔은 금발도 아닌데 갈색도 아닌 것 같은 것이… 그러나 이때까지는 우리 식구라기보다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초코와 급격히 가까워진 것은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나서였는데,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내 침대 위에서 마주쳤던 초코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는 초코가 내 침대에 올라오던 것을 기겁하던 때였는데 초코는 살짝 열린 내 방문을 발로 밀고 들어와 내 품을 파고들었다. 아침인사였는지 혀로 나를 핥으려고 했는데 당황한 나는 그 핥음은 피했으나, 그 눈빛은 피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그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키우는 '개'가 아닌
우리 식구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구동성으로 외치겠지만 반려견과 함께인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일들이 생길 수도 있다. 가볍게는 매일 아침 대소변을 치우는 것, 1~2주에 한 번은 목욕을 시켜야 하는 것, 때마다 병원에 데려가는 일, 강아지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두는 일 등이 있고, 크게는 그녀가 물어뜯는 집안 곳곳의 물건들, 함께 휴가 떠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 비싼 병원비, 사료값, 패드 값 등등이 불편한 일이 될 수 있다. 사실 대소변 같은 경우 처음에는 '끄악' 소리를 외치며 치웠지만 이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이제 사람 똥 같은 대형견의 그것도 잘 치운다 ^-^v) 목욕 역시 처음엔 어찌할 바 몰라 종종 거렸지만 이제는 익숙해졌고, 초코가 성장하면서 물건을 물어뜯는 일도 거의 사라졌다. 참고로 어릴 때 무언가 물고 뜯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장난감을 주거나 물고 뜯을 수 있는 껌이 있다면 예방이 된다.
그렇다, 반려견과 함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 아이' 한 명을 입양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강아지를 키우고 몇 년 전 떠나보낸 윗집 아주머니 말로는 사람은 키우면 지 밥이라도 혼자 차려먹지, 강아지들은 죽기 직전까지 내 손길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셨다. 한 생명과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책임감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외할머니 말씀으로는 정말 '아이'같아서 늘 보살핌이 필요하고 애정을 주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반려견은 커다란 행복과 기쁨을 준다.
그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
반려견은 커다란 행복과 기쁨을 준다.
앞서 언급한 내가 어릴 적 키운 동물들과 교감을 하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부족했다. 병아리는 일찍 죽었고, 새는 교감하기 짧았고(녀석이 나와의 교감을 원하지 않았는지도... 어느 날 새장 문을 열고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갑각류는 교감을 하기엔 어려운 동물이 아니었나 한다.
그런데 초코는 달랐다. 눈빛을 마주했고 그에 따른 행동을 했고, 분위기를 감지해서 시무룩해있기도 했으며, 애교를 떨기도 했다. 함께 산책할 때 자꾸 나를 돌아보거나, 즐거운 뒷태로 달려 나가기도 하고, 화났을 때는 짖고, 피곤할 때는 정신없이 잠을 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장 크게 교감한다고 느꼈을 때는 내가 몸이 아파 혼자 집에 있을 때였다. 그날 하루 종일 초코가 내 옆에 붙어있었다. 옆에 있는다고 약을 갖다 주거나 죽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심한 기침을 할 때마다 다가와서 나를 핥으려는 행동에 큰 위로를 받았다.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의 비언어적 행동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래서 서로 마음이 통했을 때 더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신기하고 즐거웠다. 나는 동물과 교감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위로와 교감
보통 여자들이 아기를 낳으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들 하는데,
나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 우리 가족에게 초코는 말 그대로 ‘반려견’이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 없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다. 처음엔 엄마를 초코의 주인이라 칭했었는데 이제는 자연스레 엄마는 초코’엄마’고 나는 초코의 ‘언니’가 됐다. 강아지를 키우는 것에 대해서 가장 걱정하셨던 아빠도 초코에게 완전히 마음을 여셨고 초코가 온 후 이름 정하기, 병원 데려가기, 산책시키기 등을 하면서 가족 간에 소통이 더 늘어나 함께 웃을 일도 많아졌다.
애인이 있다고 친구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듯 사회생활이나 가족을 통해서 우리는 누군가와 교감하지만 사람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동물과의 교감으로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잘 알려져 있듯 강아지들은 무한한 애정으로 가족들을 바라본다. 언제나 기다리고, 반겨주고, 나를 좋아해 준다. 이러한 존재를 가족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까.
보통 여자들이 아기를 낳으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들 하는데, 나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유기견 문제, 자연파괴 등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삶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잔혹하게 동물을 사육해서 그 고기를 파는 축산업자들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초코와 함께하면서 그러한 사회 현상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또한 함께 산책을 하다 보면 평소 바라보지 않던 것들을 눈길이 머물게 되는데 평소 나의 발걸음이나 호흡으로는 쉽게 지나쳐버리는 것들이 많았다. 초코로 인해 자연의 작은 신비로움, 혹은 우리 동네의 구석구석, 사회문제들까지 다시 바라보게 된다. 내 삶의 영역이 더 넓어진 기분이다.
사람이 반려견을 키운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함께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반려견을 키우는 인구가 점점 더 늘어난다고 하는데, 만약 그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면 다양한 환경문제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몰랐던 삶의 또 다른 영역을 만났으면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기쁨을 맛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