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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Day Aug 05. 2016

서로 도와 함께 살기

트라우마 떨치기

‘사람과 동물의 공존’이라,

사람, 동물 뭐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 쓰라는 건가, 사람과 동물이 어떻게 어울려 살고 있는지 쓰면 되는 거겠지 싶은데, 한편 사람과 동물이 공존이라는 말을 붙일 만한 관계였나 싶었다.

우선 ‘공존’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공존 (共存)[공ː존]

  [명사]

     1.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이 함께 존재함.

     2.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함.

     유의어 : 병립, 병존, 공생2

                           <출처: 국립국어원/네이버사전>


첫 번째 뜻은 한자 그대로를 풀이했으니 이해가 되었고, 두 번째 뜻을 보며 멈칫했다. 사람과 동물이 서로 돕고 함께 존재하는 그런 관계이긴 한가. 아니면 그런 관계를 기대할 만큼 동물이 우리 삶에 주는 영향력이 커졌다는 뜻인가.


동물을 식량자원이나 부의 척도로 보는 실리적이고 실용적인 시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애완동물을 넘어 반려동물이라고 칭하며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동물은 그 존재만으로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출처: 네이버 / 브리턴 리비에르, [신뢰(Fidelity)], 1869년]
[출처:네이버/브리턴 리비에르, [공감(Sympathy)], 1878년]


반려동물의 시작은 19세기 유럽의 산업화로 인해 대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빠르고 생산력 뛰어난 기계에 밀리지 않으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며 발버둥치는 삶을 살 때부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인간이 존재했던 그 어느 때부터 줄곧 함께였고 먹고 살기 위한 그야말로 생존의 도구 이상이었으며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작이 어떻든, 사람들이 동물을 보는 시선이 어떻든간에 ‘공존’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단어적 의미에 대해서 수긍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본다.



사실, 나는 동물과 그다지 가깝게 지내온 편은 아니다. 싫은 것은 아니고 무서워서다. 내가 초등학생이고 여동생이 유치원에 다녔을 때인 것 같은데, 마당에 풀어놓고 키우던 진돗개 뽀삐 등에 올라탄 여동생이 뽀삐 사정은 봐주지도 않고 사정없이 이랴이랴 ‘말타기’ 놀이를 한게 화근이 돼서 그만 무릎을 물렸고, 엄마는 뽀삐 털을 조금 잘라서 불에 태우고 그 재를 상처 부위에 지혈하듯 붙이고 밴드로 감은 후에야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엄마는 의사선생님께 말도 안되는 민간요법을 했다며 감염의 위험 어쩌고 하시는 핀잔을 들으셨고, 동생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되는 상처부위에 봉합수술을 받았다. 조그만 체구에 저 큰 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싶을 정도로 병원이 떠나갈 정도로 울어대는 통에 우리 가족 모두 더 정신이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우리 집에서 키울 수 있는 애완동물은 수조속에서 우리를 공격할 수 없는 열대어나 거북이로 바뀌게 되었고, 요즘은 믹스견이라고 부르는 태어난 지 한달 정도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강아지가 분양받기 전 일주일 정도를 키우며 입양 위탁모(?) 역할을 했을 뿐이다.


여동생은 지금도 ‘개’를 보면 작든지 크든지, 사납든지 순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일단 피하고 본다. 함께 길을 걷다가 저만치 길 끝에서 꽤나 시끄러운 강아지가 왈왈 짖으며 뛰어오기라도 하면 전봇대나 큰 나무나 가로등이나 붙들 수 있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찾아 매달린다. 우리 집 앞마당에서 우리 진돗개 뽀삐를 타고 놀다가 물려서 병원신세를 지는 그 날의 일을 나도 함께 바로 옆에서 겪은 탓에, 목줄없는 강아지를 만나는 게 그렇게 긴장되는 일일 수 없다.


강아지 말고도 다른 동물을 키우며 살 수 있는 기회도 몇 번 되지 않았고, 그 마저도 동물마다 1년을 넘지 않았으니 마음을 붙일 시간이 짧았지만, 생명으로써의 고귀함에 대해서는 누가 가르쳐 아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어서 감사했다. 각종 매체에 오르내리는 동물학대 사건, 버려진 길고양이, 그저 악세사리나 장난감처럼 쉽게 소비되고 쉽게 버려지는 유기견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마음이 울컥한다.


아직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떨쳐버리기 쉽지 않고, 어릴 적 살던 마당있는 집에서 지금은 옆집과 담벼락 하나로 붙어 지내는 빌라로 옮겨와 살고 있어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려면 주변 이웃들에게 양해도 구해야 하고 천식이 있었던 나는 털갈이하는 동물과 함께 지내기 어렵다는 생각이지만, 여전히 동물들과 공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회사에서는 북극곰과 반달가슴곰, 돌고래, 황제펭귄, 다람쥐원숭이도 함께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자연이 더 이상 오염되지 않도록 시민 캠페인도 열고 집에서는 꽤 철저하게 분리수거를 한다. 된다, 안된다는 설전을 벌이면서까지 말이다.


우리가 동물과 서로 도우며 함께 지내기 위한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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