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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와 잡념

by 준혜이

아무래도 깊어져만 가는 겨울을 맨몸으로 통과할 달리기는 매번 현관문을 여는데서부터 무리다. 하지만 일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면, 그래도 무리인데 달린다. 왜냐하면, 그러게, 왜. 왜냐하면 내 속엔 떨쳐내버려야 할 잡념이 매일 새로운 강도로 들끓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는 이 잡념을 팔아 부디 달걀 한 판이라도 살 수 있다면, 자본주의적이게 괴로웠다. 어쨌거나 운동복 차림으로 거실을 왔다 갔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 이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거침없이 가르는 여인이 될 순 없어요.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잡념이 계속해서 내 하루에다 달리기를 낳으므로 하릴없이 이 상태에 시달리겠다는 의미로. 아니 사실은 그동안 달려온 거리와 시간이 초래한 체형 변화가 마음에 드니까. 아무 데나 다 축 처진 중년의 위기를 가능한 한 모면해 보고자

달리는 중에도 잡념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언제부턴가 달리기만으로 버겁던 몸과 마음이 달리기에 익숙해져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달릴 길을 어제와 달리한다던가 달리는 속도를 높인다거나 해서 생각을 점차 줄이다 아예 멈춰 세우면 되는데. 오랜 세월 똑같은 길을 반복해서 달리며 긴장감 없이 누리게 된 움직임에 유창한 몸과 거기서 비롯될 자연스러운 성취감은 어떡하라고.

우정이란 말에 붙들려 달린 하루. 어려서 연애하다 실연한 내가 거듭 또 다른 연인을 찾아 헤매고 다닐 수 있었던 건 그 시절 내 곁엔 영원히 변치 않을 우정을 나눌 거라 서로 확신한 친구가 있어준 덕분이다. 아무나와 연애할 수는 있어도 친구가 되긴 힘들어, 같은 고백도 서슴없던. 하지만 지금 누구보다 나와 가까이서 실감 나게 계속되는 우정은 달리기 하나뿐이오,라고 속세를 벗어난 중년의 위기처럼 어디 한 번 염불 하듯 절규해 볼까요.


달리기의 묘미는 과연 정신 나갈 듯 말듯한 스스로를 근육적으로 감당케 한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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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혜이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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