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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d Enabler Apr 17. 2022

21.생각엔 정답이 없다.

아이가 커가면서 가끔 엉뚱한 말을 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아이가 펠레 위인전을 읽더니,

'역시 월드컵에서 탈락된 나라 소식을 들으려면 TV를 봐야 돼!'라는 말을 했다.

'응?, 무슨 말이야?' '이 책에 펠레의 저주가 나왔거든'하며 아이는 열심히 펠레의 저주 얘기를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들어도 난 이해를 못 하겠는데? 그게 TV랑 무슨 관계가 있어?'

'아니, 그럼 그 소식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겠어요? 펠레가 전 세계를 뛰어다니며 누가 이길 건지 전달했겠어요?'라며 아이는 내가 몹시 답답해서 이해가 안 된다는 어투로 말을 던졌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오며,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허나 초점이 맞지도 않는 말에, 정정하기엔 틀린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아... 그렇구나'라며 마무리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더 이어 줄 말, 그렇다고 '아니! 넌 대체 그 책을 그거 이해하려고 읽었니?'라며 면박을 줄 일도, 혹은 '그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이겠어?'라고 본격적으로 학습 모드에 진입할 일도 아니었다. 


며칠 후 누군가 흥미로운 동영상을 보내줬는데, 영상은 토끼와 거북이의 시합 이야기를 토대로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 있었다.

거북이에게 진 토끼가 게으름을 후회하여 2번째 시합에서는 절대적으로 이긴 이야기, 그 후 거북이가 고심하여 시합 경로에 강을 넣어 이긴 이야기를 거쳐, 두 동물은 서로의 재능을 인정하고 협력하여 결국 win-win을 달성한 스토리였다.


내용이 자기 강점 개발과 협력에 대한 메시지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도록 잘 풀어져있었다. 전달 메시지가 의미 있어,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보여줬다.


짧은 기억이지만, 6살 즈음인가, 아이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특히나 태생이 빠른 토끼가 게으름을 피워 느림보 거북이에게 진 내용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왜 토끼가 져야 돼, 토끼 이기게 해 줘....'라고 생떼를 쓰곤 해서, '토끼가 자기 재능만 믿고 노력을 안 해서, 열심히 노력한 거북이가 이긴 거야. 정신 차리고 다시 시합했을 때는 이겼대'라는 말로 무마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해줬던 얘기가 포함된 이 영상을 보며, 싫어하던 결론이 뒤집힌 얘기에 아이가 만족하길 바랬다.

또 한편으로 아이가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를 제대로 알게 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결국은 능력이란 내 기준안에서, 내가 정해놓은 길에서의 잘하는 것이지, 그 경로 내에서 잘하지 못한다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는 타고난 재능이 있으며, 내 재능과 강점을 펼칠 수 있는 나의 경로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경로에서 뛰어날 수는 없으니, 각자의 재능을 협력을 통해서 함께 가는 것이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4분 30초 영상에 아이에게 너무나 큰 것을 바랐던 것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온다.


아무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어?'라는 나의 질문에, 영상을 보고 난 후 아이의 말 얼마 전 펠레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결국... 토끼와 거북이 둘 다 꾀가 바닥났구나!'


대체 뭐지?, 아니 애 생각이 왜 이렇게 엉뚱해?

아니, 논술 학원에 보내야 하나? 애가 맥을 전혀 못 집네... 생각의 부족인가, 훈련의 부족인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은 영상을 본 내 생각과, 영상을 만든 사람이 하고 싶었던 내용을 공유할 일이지, 아이 생각에 대한 지적의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전달된 내 생각을 아이가 정말 그런가?라고 잠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생각 역시, 그것을 보거나 읽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중 단지 하나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의도를 만든 내용을 누군가 볼 때, 그 내용을 보는 사람의 생각은 다 다를 수 있지 않은가... 의미나 생각이란 내가 어떻게 부여하느냐, 어떤 것을 찾아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박웅현 씨의 여덟 단어 책에서 '견'이라는 챕터에 소개된 시가 있었다.


안도현,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가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룸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끄고 잘 시간이야


박웅현 저자는 똑같은 꽃게를 보고 다른 것을 읽어낼 수 있는 볼 수 있는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생각의 탄생'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발견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덟단어가 제시한 견해에 위안을 받으며, 이의 엉뚱한 흐름에 대한 나의 염려는 잊기로 했다.


무엇을 듣고, 보고, 읽을 때 핵심을 파악하는 역량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먼저 본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이의 생각을 정정하는데 에너지를 쓸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 신선하고 청량한 생각의 줄을 잡고 조심스레 꾸준히, 끈질기게 줄의 시작점을 찾아보는 것,

그리고 그 속의 숨은 재능을 함께 발견하는 일가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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