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육아와 프로토타이핑의 상관관계
모두가 힘든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이 땅에 역병이 창궐하는 상황을 21세기에 마주하게 되다니,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반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 나들이는 커녕 가벼운 동네 산책도 조심스럽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럴수록 아이가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에 대해서 염려하게 된다.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대신 집에서 최대한 즐겁게 지내자는 생각에 주말이면 늘 거실에 앉아 무얼 만들까 궁리하고 두리번 거리며 만들기 재료를 찾는게 일상이 되었다. 여느 어린이들이 그렇듯 우리집 어린이도 만들기라면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하는 편이다.
이제는 제법 요령도 생겨서 아이와 무언가 만들기 전에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하나씩 메모하다보니 마치 업무 가이드처럼 그럴듯해 보여서 이렇게 글로 남겨본다.
어떤 날은 분명한 대상을 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저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싶은 마음에 나를 찾는다. 스스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스무고개를 하듯 범위를 좁혀나갈 필요가 있다.
“재미있는거 만들어 주세요!”
“어떤걸 만들어 볼까~? 집처럼 들어갈 수 있는거? 아니면 부엌놀이? 아니면…”
“부엌놀이!!!”
“음… 그럼 부엌에는 싱크대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또…”
“냉장고!!!!!!!”
만들어야 할 대상이 정해졌다면, 어떤 재료를 사용할 지 결정해야 한다. 미리 만들기 재료를 구비해 두는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가 많아서 늘 아쉬움이 남는다. 만들기로 한 대상과 가용한 재료의 특성을 잘 생각해서, 가장 적절한 재료를 선택한다.
속도가 생명이다. 만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해관계자들은 지루해하고, 어쩌면 또 다른 흥미거리를 찾아 자리를 떠날지도 모른다. 내가 만드는 것은 완제품이 아니다. 어설퍼도 좋으니 기다리는 아이를 위해 빠르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것은 속도와도 연관된 이야기. 디테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다보면 만드는 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 없다. 냉장고를 만든다면,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칸과 문짝에만 집중하면 된다. 물론 상자를 예쁘게 칠하고 문짝이 부드럽게 열리고 닫힌다면 더욱 만족하겠지만, 그런 디테일을 신경쓰기에는 주말이 너무 짧다.
일단 0.1 버전이 완성되고 나면, 먼저 시연을 해본다. 그냥 전달하기 보다는 약간의 연출이 가미될 때에 내 결과물이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짜잔~! 이렇게 문도 양쪽으로 열리고, 냉동실이랑 냉장실에 칸도 여러 개 있지!”
“우와~ 진짜 그럴듯한데? 냉동실도 있네요?!!”
“그러엄~!! 차가우니까, 조심하세요!!”
0.1 버전을 가지고 놀다 보면, 이런저런 이슈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발견된 사항들을 하나씩 개선하다보면 점점더 목적에 부합하는 형태를 찾게 된다.
“어? 그런데, 여기 문짝에 달린 칸이 너무 약해서 음식을 못 넣겠어요.”
“냉장고 문이 꽉 안닫혀서 음식이 다 상하겠어요.”
그래서 지금 그 냉장고는 어디에 있는가? 베란다 한 쪽 구석에서 햇빛만 바라보는 중이다. 아이의 관심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하고, 언제든 새로운 것을 만들 준비를 해야 한다. 택배상자로 만든 냉장고는 버려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장에 출시된 완제품도 쉽게 외면받는 마당에 프로토타입이 잊혀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직하고 정신없이 달려오다보니 어느새 반 년이 훌쩍 지나버렸고, 이 난리통에 집안에는 각종 프로토타입이 쌓여가고 있다. 덕분에 올해는 많은 글을 쓰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손으로 만져지는 것들을 다루다 보니 어린시절 생각도 나고, 아이랑도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훗날 아이가 지금을 떠올렸을 때,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그래도 즐거웠어” 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2020년 7월 16일에 발행한 미디엄 원문 링크를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