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라 쓰고 월급쟁이라 읽는다.
얼마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된 디자이너들의 오픈채팅방이 있다. 아무런 부담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함께 어울렸던 것 뿐인데, 그런 만남이 어디부터 잘못 됐는지, 난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쯤, 각자의 출신과 연봉에 대한 관심을 더 보이며, 난 조금씩 궁금하던 그 어느 날, 간단한 설문을 해 보았다.
정량적으로 의미가 있다거나 심오한 분석이 있다기 보다는 아무말과 무논리로 점철된 오류 투성이 설문과 그 결과 이므로 절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기를 바라며.
2018년 7월 6일부터 8일까지 직장인 익명커뮤니티를 통해 유입된 UX/UI 오픈채팅방 참여자 100명을 대상으로 Google Form을 통한 설문을 실시하였으며, 응답률 63%에 신뢰수준 아주 조금, 표본오차 플러스마이너스 아주 많이.
역시 예상했던대로 중소기업이 많았으나,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분도 상당수 있었다. 그리고 인하우스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의 숫자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의 2배 정도였다.
나 역시 에이전시에서 인하우스로 옮겨 왔는데, 내 경우에는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과 권리가 비례하지 못한다는 것과 클라이언트의 취향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는 것과 기타 여러가지 이유로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지 못한 지점들이 많다는 것이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규모에 대한 응답에서는 프리랜서와 취업준비의 합이 9명인 반면, 유형에 대한 응답에서 기타(취업준비 포함) 7명인 것으로 보아,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면서 이직을 준비하거나, 프리랜서 일을 별도로 하는 경우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해외 1명, 상당히 궁금하다. 어디서 일하고 있는 걸까?
4년차를 제외하고 그 숫자가 꾸준히 증가하다가, 5년차에서 정점을 찍고는 갑자기 크게 줄어드는 양상을 볼 수 있었다.
보통 3의 배수에 해당하는 연차에서 변곡점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래서 3년차가 되었을 때, 이직을 하거나 아예 업계를 떠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4년차에서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그런 탓이었을까? (5년차가 가장 많다는 점에서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6년차부터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조금 생각해 볼 일이다. 커뮤니티의 특성 상, 시니어 보다는 주니어의 참여율이 높아서 그럴 수도 있고, 직무의 특성상 남성보다는 여성이 비율이 높아서, 결혼/출산/육아 등의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결과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디자이너로 장수하기는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회사의 규모나 유형, 직군이나 직무 등을 고려하지 않고, 연차와 연봉만을 나열해 보았다. 평균만 놓고 따져 본다면, 10년차 이상을 제외하고는 2천만원 후반에서 4천만원 후반으로, 8년동안 약 2천만원 정도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럴수가. 정말일까?
2018년 상반기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의 평균 연봉이 4,017만원이었다. 시작점이 다르니, 같은 폭으로 상승한다 해도 연차가 올라갈수록 그 간격이 더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평균의 함정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적 박탈감을 추스리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크다.
벌어지는 간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로, 5년차의 최저 연봉이 처음으로 3천만원을 넘어섰다. (대기업 대졸 초봉 평균이 4,017만원이었는데!!) 만약 일찍 취업하고 결혼해서 생계를 책임지는 외벌이 디자이너가 이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다면, 이는 2018년 2인가구 중위소득인 월 285만원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거기에 학자금 대출, 전세/매매 대출, 혹은 자녀 양육/교육비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답은 세 가지 뿐인 것 같다. 맞벌이를 하거나, 투잡을 뛰거나, 디자인을 그만두거나.
아니야, 아닐꺼야 하고 한발짝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대기업은 주니어부터 시니어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반면,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은 시니어 층이 두텁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었던 부분은 10년차 이상 응답자였다. 대기업에서 2명. 역시 디자이너로 장수하려면 대기업으로 가야하는 걸까?
아무래도 업무 프로세스의 체계화 정도와 고용 안정성(돈??!!)을 따져보았을 때, 대기업이 아니고서야 디자이너로 오래 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지배적인 인식이 아닐까 싶다.
해외로 탈출하면 사정이 좀 나아질까?
첫 질문에서 해외로 응답했던 1명은 이제 막 시작하는 0년차인데 연봉이 4,500만원 이었다. 국내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 그 나라의 물가수준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서 국내와 큰 차이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엄청 비약해서 생각해보면, 압축적으로 제조업 중심의 성장을 하다 보니, 어떻게든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문화가 팽배하여 디자인은 그저 겉치레 정도로만 생각되고 있다거나, 여전히 여성의 비중이 높은 영역으로 남성의 노동에 비해 평가절하 되고 있다거나, 매년 배출되는 전공자의 수가 많다보니 싼값에 부리고 반발하면 또 다른 사람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거나, 등등의 서글픈 이유들이 떠오른다.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최고의 복지는 연봉이라는 말도 있고, 주머니에 여유가 생긴다면 근속 기간도 자연스레 따라갈 것이다. 비슷한 수준의 일을 한다면 연봉도 비슷한 수준이어야 하지 않을까? 기업의 지불 능력이 한계라고 한다면, 주거비와 양육비, 교육비 만이라도 잘 잡아서, 적게 벌어도 적당히 먹고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사회 구조를 만들 수는 없을까?
최저임금 인상 논란이 여느 때보다 뜨거운 요즘, 연차와 연봉에 대해 재미삼아 해 본 설문이 큰 화두를 안겨주었다.
2018년 7월 16일에 발행한 미디엄 원문 링크를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