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효과 - 02화
그날, 나는 모처럼 마음이 설레고 들떠 있었다. 막 연애를 시작한 사람처럼.
조금 전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예정대로 여행 준비해 줘. 두 시까지 들어갈게.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해."
휴일도 없이 매일 바쁜 남편 덕분에 휴가는 늘 먼 이야기였다.
그래도 이번 여름 방학에는 아이들만이라도 데리고 가까운 수영장에 물놀이라도 한 번 다녀와 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일주일 전, 휴가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결혼한 지 15년 만에 처음 맞는 가족 여행이라는 생각에 나 역시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정오가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아무래도 휴가가 연기되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출발을 한 시간 남짓 앞두고 갑자기 전화가 와 휴가를 통보하듯 말하며 출발 준비를 명령했다.
남편은 늘 그랬다.
부부 동반 외출을 할 때도 혼자 준비를 끝내고는 현관문을 열어 둔 채 기다리기 일쑤였다.
그러면 나는 늘 조바심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쳐야 했다.
"현관문 열어 두지 마세요. 세형이 나가면 안 돼요!"
아파트 소독하는 날, 잠시 현관문을 열어 둔 그 짧은 사이에 아이가 사라졌던 적이 있었다.
그날은 정말 십 년 감수를 했다. 관리실에서 인터폰으로 연락이 와 아이를 찾을 때까지, 40분 동안 지옥이 있다면 이런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곳이겠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꼈다.
열 살인 큰딸은 혼자 씻고 옷을 입을 줄은 알았지만,
"엄마, 노란 블라우스 입을까? 빨강 치마 입을까?"
하며 쉴 새 없이 물어보는 통에 위아래 배색을 맞춰 하나하나 꺼내 주어야 했다.
엉덩이까지 찰랑거리는 머리를 빗거나 묶을 때는 꼼짝없이 달라붙어 족히 십여 분은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이런 사정을 남편이 더 잘 알면서도 말이다.
긴 머리가 성가셔 한 번은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좀 자르자고 딸을 꼬드겨 보았다.
"세희야, 미장원 가서 머리 좀 자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희는 눈썹을 치켜뜨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안 돼, 아빠한테 혼나!"
남편은 거의 병적으로 긴 머리에 집착했다.
신혼 때는 내 긴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게 해 이런저런 불편을 주더니, 이제는 세희의 머리칼에 마치 목숨을 건 사람 같았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잘생긴 남자 탤런트에게 이상형이 무엇이냐고 묻자 '긴 머리 여자'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은 무릎을 치며
"맞아, 남자들은 다 그렇지 않아?"
라고 말하며 마치 세상 모든 남자가 긴 머리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단정 지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자들이 다 그런 건지, 유독 남편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단순한 잣대를 가지고 사는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들뜬 마음을 달래며 출장용 가방을 꺼냈다. 젖은 걸레로 먼지를 닦아낸 뒤 남편의 속옷을 하나씩 접어 넣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속이 쓰려왔다. 생각해 보니 어제저녁부터 속이 거북해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도 걸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물이라도 말아 한 술 떠먹을 걸 그랬나 싶어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약한 현기증이 일며 눈앞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서랍 속에서 지난번 남편 생일에 선물했던 팬티 세트가 눈에 띄었다. 검정, 초록, 주황색 팬티 세 벌이 들어 있는 선물세트였다. 고무 밴드 부분이 넓고, 거기에 영어로 상표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남편은 그 팬티를 입고 유난히 툭 튀어나온 자신의 남성 부위를 내려다보며 킥킥거리곤 했다. 그럴 때면 꼭 열 살짜리 아이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편의 잠든 모습은 자꾸 뒷모습만 떠올랐다.
"돌아눕지 마. 등 돌리고 자는 거 싫어."
내가 이렇게 말해도 남편은 그저
"응, 응."
하고 대답만 할 뿐, 이내 또 돌아누워 잠들었다.
한 번은 내가 남편의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 누운 적이 있었다.
"어? 자리를 바꿨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이 물었다.
"응. 이렇게 하면 당신이 날 쳐다보면서 잘 수 있잖아."
"응. 그래. 알았어."
하지만 그날도 남편은 반대쪽으로 돌아누운 채 코를 골며 잠들었다.
나는 똑바로 누워 천장의 등기구에 반사된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며, 길 위에 버려진 운동화 한 짝 같은 소외감에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