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변기 물탱크 속 빨간 벽돌

그땐 그랬다

by JUNI KANG


화장실에 앉아 물을 내리려 버튼을 눌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버튼을 몇 번이나 눌러보았지만, 덜렁거리는 버튼만 허공을 맴돌 뿐 물은 내려가지 않았다.

뚜껑을 열어 확인해 보니 버튼과 연결된 줄이 끊어진 채 물속에서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줄을 다시 연결해 보려 애를 썼지만, 이미 삭아버린 부속들은 건드릴 때마다 툭툭 부러지고 깨졌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변기 물탱크 안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일은 새 부품을 사다 교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왕 뚜껑을 연 김에 오래 미뤄두었던 물탱크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솔로 벽면을 박박 문질러 묵은 때를 지워냈다.

뽀얗게 일어나는 흙탕물을 몇 번이나 비워내고 나서야 비로소 맑은 물이 탱크 안에 가득 찼다.

출렁이며 차오르는 그 깨끗한 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아주 오래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벽돌. 빨간 벽돌.

예전에 이 물탱크 안에는 늘 벽돌 하나가 들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한 국제 연구기관의 보고서를 통해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되었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다.

그 무렵 사람들은 이미 물에 대해 한 번 크게 놀란 뒤였다. 낙동강 페놀 사건으로 수돗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뉴스가 연일 이어지던 때였다.


갑작스러운 발표는 선뜻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정부와 언론은 곧 물 절약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때 등장한 방법이 변기 물탱크 속에 벽돌이나 물이 가득 찬 페트병을 넣자는 것이었다.

벽돌의 부피만큼 물을 아끼자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였다.


눈치 빠른 동네 철물점들은 가게 앞에 빨간 벽돌을 가득 쌓아두고 팔았다.

사람들은 그걸 하나씩 사서 집집마다 변기 물탱크에 넣었다.

어떤 이는 마치 애국이라도 하는 양 벽돌을 두 개나 넣었다며 자랑 섞인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뉴스에서는 연일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밀양이나 횡성, 용담 같은 곳에 거대한 댐을 지어야 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물은 부족하고, 강물은 믿을 수 없고, 결국 더 큰 물그릇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그 거창한 국가적 계획에 보탬이라도 되려는 듯 기꺼이 변기 물탱크 속에 벽돌 한 장의 불편함을 담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벽돌 한 장은 거대한 정책과 평범한 일상이 만나는 가장 작고 투박한 접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떠들썩하던 물 절약 캠페인은 어느 날부터인가 약속이라도 한 듯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물 부족 국가’라는 표현도 UN이 공식적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한 사설 연구소의 보고서에서 비롯된 개념이었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왜 그렇게 철석같이 믿으며 벽돌 한 장에까지 마음을 쏟았던 것일까.


세월이 흐르며 낙동강 페놀 사건도, 물 절약 캠페인도, 우리의 기억도, 그리고 물탱크 속 벽돌의 존재도 서서히 잊혀졌다.

그런데 오늘, 끊어진 줄을 고치려 물탱크 뚜껑을 열었을 때 비로소 내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그 벽돌이 떠오른 것이다.


추억은 늘 이렇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찾아온다.

낡은 변기 속에서 발견한 기억의 조각을 더듬다 보니, 참 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의 씁쓸한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의 의도였든 우리의 순수한 다짐이었든, 벽돌 한 장에까지 마음을 쏟아야 했던 그 시절이 오늘따라 유난히 진한 잔상으로 남는다.


버튼과 물탱크 부품을 교체한 후 물을 내려 보았다.

시원하게 내려가는 물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물을 아끼자며 변기 물탱크에 벽돌을 넣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그런 마음마저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물만이 아니라, 그 시절 우리가 함께 믿고 함께 실천하던 작은 정성들까지도 모두 흘려보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물탱크 속에 들어 있던 그 빨간 벽돌 하나가 다시 떠올라, 많은 생각을 하게 된 날이었다.




(2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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