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차라리 타인이었더라면

인연의 무게

by JUNI KANG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내가 근무하던 회사의 대주주라는 노인분이 만나자고 연락해 왔다.

통화는 몇 번 해봤지만 얼굴도 모르는 분이라 의외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약속이 잡혔다.

내가 만남을 거절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우리는 근처 허름한 순댓국집에 마주 앉았다.

그 노인은 막걸리 한 주전자를 주문했다.

식사가 시작되기도 전, 막걸리 몇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켠 칠순의 노인은 된장을 찍은 오이를 우적거리며 힘들게 숨을 쉬었다.

뚱뚱해서 그런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어깨가 들썩였고, 쉬익 쉬익 거친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노인은 순댓국이 나오자 국물에 새우젓과 들깨 가루를 퍼부었다.

이미 술기운이 오른 듯 얼굴이 붉어졌다. 숨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러고는 마치 오래 참아왔다는 듯 자식들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는 막내의 사업장을 자신 소유의 빌딩 4층에 오픈해 주었는데, 개업식 날 사 형제가 또 싸움이 났다고 했다.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던 중 누군가가 가져온 식칼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결국 둘째 아들이 경찰서로 끌려가고서야 일단락이 되었다.


다음 날 둘째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경찰에 신고했다고 악다구니를 쓰며 욕을 퍼부었다고 했다.


그는 연신 한숨을 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돈은 많이 벌었지. 그런데 자식 농사는 다 망쳤어."


그 말이 유난히 뇌리에 남았다.

순댓국 국물은 따뜻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씁쓸하게 느껴졌다.

인생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어서 자신이 주주인 회사의 직원을 불러내 앉혀놓고, 순댓국 한 그릇 안에 후회를 가득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이 일대에 7개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부족한 게 없다고 해서 인생이 풍족한 건 아니었다.

막내 자식과 동갑인 나에게 집안의 민낯을 털어놓는 노인이 너무나 외롭고 처량해 보였다.


이제 내가 그 노인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문득 돈이 많아도 행복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 그 노인의 결과가 궁금해졌다.

노인의 인생이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을까.


어제, 뉴스에서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사건을 접했다.

생일상을 차려준 아들을 아버지가 총으로 살해했다는 이야기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차마 끝까지 뉴스를 보기 어려웠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인연이 때로는 왜 이토록 참혹하고 무거운 것일까.


그날 순댓국 앞에서 마주한 노인의 한숨과 어제 뉴스에서 들려온 총성.

그 둘이 겹쳐지며 마음 깊숙이 어떤 질문이 내려앉는다.


이들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인연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덜 불행했을까.

차라리 스쳐 지나가는 타인이었더라면 서로에게 상처를 덜 주었을까.


부모와 자식, 그 인연의 무게가 때로는 축복보다 잔인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오래도록 마음을 누른다.




(2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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