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퇴근길, 현관 앞 (05)

푸른 청춘의 나날

by JUNI KANG


길거리에는 진달래가 만발했다.

선미의 잔업이 늘어나면서 저녁에 잠깐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선미가 민우를 생각할 때 민우는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고, 민우가 선미를 떠올릴 때 선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엇갈린 시간 속에서 서로에 대한 그리움만 깊어졌다. 틈틈이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을 온전히 전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어떤 날은 새벽 3시가 다 된 시간에 메시지가 오기도 했다.

[오빠, 지금 바빠?]

[음, 지금은 좀 한가해졌어. 근데 이 시간에 왜 안 자고?]

[응, 잠이 안 와. 오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민우가 전화를 걸면 선미는 반쯤 졸린 목소리로 아무 이야기나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민우는 오늘 다녀간 손님들 이야기를 나직하게 들려주었다.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면 어느 순간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선미야, 선미야.”

불러봐도 대답이 없으면 민우는 그제야 조용히 전화를 끊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유독 선미가 보고 싶었다. 그리움이 우울처럼 온종일 뒤를 따라다녔다.

가장 바쁜 밤 11시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매캐한 담배 냄새와 진한 향수 냄새가 뒤섞여 들어왔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카운터로 성큼성큼 다가와 와인 한 병을 쾅 내려놓았다. 코르크는 이미 뽑혀 있었고, 와인은 3분의 1이나 비어 있었다.

“이거 상했어요. 식초 맛이 나네.”

민우가 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개봉된 상품은 규정상 환불이 어렵습니다.”


여자의 눈빛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셔봤지. 안 마셔보고 상했는지 어떻게 알아? 당신들 보관 잘못한 거 아니야? 나 여기 상인회도 알고 구청도 알아. 점주 번호 내놔.”

여자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자,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민우가 난처해하며 거절하자, 여자는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민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너 알바지? 월급 백만 원은 받니? 내가 이거 신고 넣으면 여기 영업정지야, 알아?”


그 말 한마디에 민우의 밤이 순식간에 초라해졌다.

여자는 뜻대로 되지 않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나 비웃었지? 내가 웃겨? 당장 사과해.”

웃지도 않은 민우에게 왜 비웃느냐며 사과를 강요하더니, 급기야 바닥에 쓰러지겠다며 비열한 협박을 일삼았다. 결국 분을 못 이긴 여자가 와인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챙그랑!


매장 바닥은 순식간에 붉은 와인과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끌려가는 순간까지도 여자는 당당하게 소리를 질렀다.

여자가 떠난 자리에는 시큼한 포도주 냄새와 고요만이 남았다. 민우는 말없이 쪼그려 앉아 바닥을 기며 유리 조각을 주웠다. 붉게 물든 걸레를 빨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그때 민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편의점 사장이었다.

“민우야, 잘 참았다. 호프집 사장님 전화를 받고 CCTV 보고 있었다. 정말 고생 많았다. 네가 좀 이해해라. 경찰에는 내가 신고한 거다. 그런 일로 기죽지 말고… 수고해라.”

전화를 끊고 나니 너무 허탈해졌다. 군복을 입고 버텼던 시간까지 가벼워진 것 같아서 괜히 억울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이상하게도 선미가 더 보고 싶어졌다.


바닥을 말끔히 청소하고 밖에서 걸레를 짜고 있을 때였다. 가게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그러고는 거짓말처럼 그 안에서 선미가 내렸다.

민우는 환상을 보고 있나 싶어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선미가 환하게 웃으며 뛰어왔다.

“오빠!”

선미가 아무 말 없이 민우를 꼭 끌어안았다. 대걸레가 쓰러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냥 갑자기 오빠 보고 싶어서 무작정 왔어요. 괜찮지?”

민우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잘했어.”

민우가 힘을 주어 선미를 더 세게 안아 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꼭 안고 서 있었다. 선미의 머리카락에서 배어 나오는 은은한 린스 향이 좋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컵라면과 도시락을 나눠 먹는 그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민우의 복학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선미는 걱정하면서도, 자신도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마음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나도 오빠랑 같이 대학에 1년 만이라도 함께 다녔으면 좋겠다. 그래서 ‘CC’라는 말도 들어보고 싶어. 나는 캠퍼스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거든.”

선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미와 나란히 캠퍼스를 거니는 날이 정말 올까. 같은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 상상을 해보았다.

미래를 함께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따뜻한 시절이 꿈결처럼 흘러 어느새 뜨거운 여름도 다 지나갔다.

민우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새워 일할 때, 선미도 그 시간을 의미 있게 쓰고 싶었다. 쉬는 시간 틈틈이 책을 읽고 영어 공부를 하던 그녀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우를 향한 그리움을 적어 내려갔지만, 차츰 상경해 공장에 다니며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본격적으로 담아냈다. 그 글을 다듬어 공모전에 냈고, 대상에 올랐다. 곧이어 한 대학으로부터 특기 장학생 선발 제안이 들어왔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철우는 선미의 글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했다. 서로에게 긍정적인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철우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철우가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에는 배신감과 화가 뒤섞여 있었다.

“왜 말 안 했냐?”

민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너한테 선미가 어떤 동생인지 잘 아니까 두려웠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내가 너보다 선미를 더 사랑할 자신 있거든.”

한동안 말이 없던 철우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선미 아프게 하지 마라. 그러면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그래, 걱정 마라. 내가 책임질 테니.”


철우는 선미의 선택을 믿기로 했다. 동생의 확고한 의지와 민우의 진심 어린 설득에 그는 결국 두 사람의 교제를 인정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던졌다.

“이 자식이 여자 보는 눈은 있네. 잘해줘라. 솔직히 너한테는 과분하니까.”

“그래, 알아. 내가 잘할게. 고맙다.”

철우에게는 어떻게든 선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선미는 고민 끝에 장학금을 고사했다.

대신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공부할 수 있는 통신대학교를 선택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민우는 복학을, 선미는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철우는 졸업과 취업 준비에 매진했다.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캠퍼스를 직접 거닐 수는 없었지만, 택배로 온 대학 교재를 받아 든 선미는 민우와 작은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를 나누었다. 교양 국어책을 한 페이지씩 넘겨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선미의 모습은 민우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민우 어머니는 몇 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다. 다시 일자리를 얻은 어머니는 동네 대형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선미 아버지는 건강 문제로 그동안 농사짓던 땅을 팔아 적지만 목돈을 마련했고, 덕분에 생계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는 취미로 작은 텃밭만 가꾸며 지내기로 했다.


사랑하는 딸이 사귀는 남자가 민우라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는 매우 놀라했다. 그러면서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라며, 이건 분명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아니겠냐고 기뻐했다.


학기가 시작되자 모두가 바빠졌다.

선미는 회사에서 사운을 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아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다음 해, 철우는 반도체 회사에 조기 취업했다.

그는 회사 근처인 Y시에 원룸을 얻어 독립했다. 선미는 기쁜 마음으로 오빠의 원룸 보증금을 송금해 주었다.

“이제 나도 해방이다!”

선미는 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민우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선미에게서 거대한 벽을 느꼈다. 오빠의 자립까지 돕는 그녀의 책임감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단단하고 높은 벽 같았다. 그것은 사랑을 넘어선 존경심이었다.


민우는 편의점 사장의 배려로 오후 6시부터 4시간 동안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학교생활에 필요한 용돈은 스스로 벌어서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선미도 후배들이 생겼다. 특히 직장에 있는 동생들이 두 명이나 학교 후배로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선미를 친언니처럼 따랐다.


선미는 어김없이 오후 7시가 되면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어폰을 끼고 노트북 화면을 보며 공부에 몰두했다. 민우도 퇴근하면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새벽 1시까지 함께 공부했다. 고단한 시간이었지만, 김밥과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서로를 다독이는 일상은 무엇보다 소중했다.


헤어질 때면 못내 아쉬워 한참을 포옹했다.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고 나서야 겨우 돌아설 수 있었다. 그런 날들이 꿈결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두 꿈을 먹고사는 푸른 청춘의 나날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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