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과박스의 온기

by JUNI KANG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

그 딱 절반, 5년 만에 다시 찾은 S시의 전통시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대형 마트의 매끈한 진열대와 세련된 조명에 익숙해진 눈에, 시장의 풍경은 다소 거칠고 투박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거칠음 속에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생명력이 꿈틀대고 있었다.


마음을 파고드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 살아있는 생선들의 비릿함,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뒤섞여 만들어내는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시장만의 언어였다.

아내와 함께 김장거리를 준비하려 작정하고 끌고 나온 핸드 캐리어의 바퀴가, 어패류 수족관에서 넘친 바닷물로 흥건한 시장골목을 누볐다.


배추며 무, 각종 양념거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내 몸과 마음은 금세 시장의 속도에 동화되었다.

캐리어는 점점 무거워졌고, 그 무게감은 곧 다가올 겨울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종의 우리들만의 의식이었다.

김, 멸치, 배추, 새우젓, 무, 대파, 고춧가루, 소금 등 짐이 늘어날수록 마음은 어수선해졌다.


넘쳐나는 물건들을 감당하기 버거워질 무렵, 나는 숨을 고를 겸, 짐도 정리할 겸 과일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은 시장 통로의 중앙에 자리 잡은 꽤 목 좋은 가게였다. 제철을 맞은 단감들이 주홍빛 등을 켠 듯 환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단감 열 개를 골라 담고, 계산을 마친 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사장님, 혹시 남는 박스 한 개 얻을 수 있을까요? 짐이 너무 많아서 정리가 안 되네요."

계산대 안쪽에서 계산을 마친 젊은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내 핸드 캐리어와 나의 얼굴을 짧게 스쳤다. 그리고는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스를 다 펼쳐놔서 지금은 드릴 게 없어요."

그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단호했고, 간결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멋쩍게 "아,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이해는 되었다. 좁은 시장 가게에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빈 박스를 즉시 해체하여 납작하게 정리해 두는 것은 '효율'을 위한 기본 수칙일 테니까.

하지만 그 빈틈없는 효율의 논리 속에, 많은 짐에 난감해하는 손님을 향한 작은 배려가 들어갈 틈은 바늘구멍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가 내뱉은 말은 의심할 수 없는 팩트였으나, 그 속에 섞인 냉기는 묘한 씁쓸함을 남겼다.

시장통의 시끌벅적한 온기 속에서 마주한 그 찰나의 차가움은 유독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다른 가게들을 돌며 필요한 것들을 더 샀지만, 짐은 정리되지 않은 채 검은 비닐봉지만 위태롭게 쌓여만 갔다. 몇 바퀴를 돌아 주차장으로 가려는 길에 다시 그 과일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아까 느꼈던 무안함 때문에 고개를 돌리고 지나치려던 찰나, 진열대 한쪽에서 빨간빛을 뿜어내는 싱싱한 딸기가 발목을 잡았다. 겨울의 초입에서 만난 봄의 전령 같은 딸기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내가 좋아하는 딸기 앞에 다시 멈춰 섰다.


딸기를 계산하려고 카드를 꺼내 들었더니 젊은 직원이 안쪽에서 툭 튀어나오더니

"이쪽으로 주세요. 여기서 계산해 드릴게요"라고 했다.

카드를 돌려받으며 나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조금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죄송한데 박스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짐이 정리가 안되네요."


그는 내 터질 듯한 핸드 캐리어를 한번 쓱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는 가게 구석, 폐지처럼 납작하게 눌려 묶여있던 박스 더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박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찌익, 칙.' 경쾌한 테이프 소리가 시장의 소음 사이로 파고들었다. 납작했던 종이 뭉치는 그의 손길 몇 번에 금세 튼튼한 상자로 되살려졌다.


그는 완성된 박스를 내 짐에 가늠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좀 작겠는데요? 더 큰 걸로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그는 군말 없이 다시 구석으로 가 더 큰 사과 박스를 찾아냈다. 다시 한번 테이프를 뜯고 붙이는 수고로움이 이어졌다. 귀찮은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짐이 많으셔서, 한 개 더 있어야 할 것 같네요."


그는 내 요청이 있기도 전에 박스 하나를 더 만들어 핸드 캐리어 위에 얹어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다른 가게에서 샀던 무거운 무와 배추, 젓갈통들을 직접 들어 올려 차곡차곡 박스 안에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이건 무거우니까 아래쪽으로 넣고요, 딸기는 눌리면 안 되니까 맨 위에 올릴게요."

그의 손길은 야무졌고, 그의 목소리엔 리듬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가 펼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납작해진 종이 박스가 아니었다.


그는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접혀있던, 사람을 향한 배려와 관심을 다시 입체적으로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사장이 '없다'라고 단정 지었던 그 박스는, 직원의 손끝에서 '있는' 것이 되었고, 나아가 '넘치는' 호의가 되었다.

처음 가게를 들렀을 때의 서운함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고마움이 대신 들어찼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를 넘어,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접받았다는 훈훈함이었다.

나는 홀린 듯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여기 사과 10개랑요, 저기 귤도 한 박스 주세요."


애초에 살 계획 목록에는 없던 물건들이었다. 집에 과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사주고 싶었다. 내가 지불하고 있는 이 값은 사과와 귤의 가격이 아니었다.

자신의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며 타인의 불편함을 덜어준 그 직원의 고운 마음씨에 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고마움의 표시였다.


같은 공간, 같은 간판 아래, 같은 물건을 파는 두 사람. 한 사람은 있는 박스도 없다고 잘라 말했고, 한 사람은 없는 박스도 만들어내어 내어 주었다.

이것을 단순히 개인의 성격 차이로 치부할 수 있을까? 아니면 타고난 인성(人性)의 깊이 차이일까?

어쩌면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이익과 손해'의 대차대조표로만 바라보는 이와, '사람과 관계'로 바라보는 이의 시선 차이 말이다.

젊은 사장은 박스를 펴는 시간과 노력을 아껴 '효율'을 챙겼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계산적인 태도는 손님의 마음 문을 닫게 만들었고, 결국 재방문의 기회조차 날려버릴 뻔했다.

반면 직원은 당장의 귀찮음을 감수하고 박스를 접어줌으로써, 손님의 지갑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열게 했다.

만약 그 직원 없이 사장만 있었다면, 그 가게는 오늘 내게서 올릴 수 있었던 추가 매출은 물론이고, 앞으로 이어질지 모를 단골손님이라는 미래의 자산까지 잃었을 것이다.


장사는 단순히 물건을 건네고 돈을 받는 행위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물건은 매개체일 뿐, 결국 그 오고 감 속에 흐르는 것은 '마음'이다. 차가운 계산기가 지배하는 세상이라지만, 여전히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은 계산되지 않는 마음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하는 따뜻한 온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양손 가득, 캐리어 위까지 높게 쌓고도 아내와 둘이서 번갈아가며 날라야 했던 물건들이 힘에 겨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편안했다.

나는 주방에서 박스를 풀고 오늘 산 물건들을 늘어놓으며 '없다'라고 말하기보다, 기꺼이 시간을 들여 '있다'며 박스를 접어주는 사람을 생각했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들의 계산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세상을 살만하게 지탱해 주는 것은 투박한 박스 테이프 소리 같은, 계산되지 않은 작고 소박한 온기들이다.


5년 만에 다시 찾았던 그 시장에 앞으로는 그런 젊은이들이 넘쳐나길 기대해 본다.


(2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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