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소마’
영화가 끝났다.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로 영화를 함께 본 아내는 엔딩크레디트가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게 왜 훌륭한 영화라는 거야? 이런 애매모호 한 작품 만들면 거장 소리를 듣는 거야? 이해할 수 없어. 뭐 있는 척하고 그럴듯해 보이면서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 영화 딱 질색이야.”
나는 말라오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뭐라 항변이라도 해 보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영화가 끝나는 순간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기 때문. ‘단 두 작품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이라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이 영화를 만든 ‘아리 애스터‘를 아내에게 소개했더랬다. 그렇게 어제 그의 첫 장편 ‘유전‘을 봤고, 미심쩍었지만 나름 볼 만은 했던 아내는 오늘 이 영화 ’미드소마‘를 연달아 보고선 결국 짜증을 내고야 만 것이다.
툴툴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내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글을 써서 보란 듯 아내에게 내보이겠노라고. 그렇게 며칠 뒤 혼자 영화를 한 번 더 봤고, 이어지는 글은 뒤늦게 정리해 본 아내에게 전하는 내 나름의 감상이 되겠다.
영화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비극을 겪은 ‘대니’라는 여성이 그녀의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스웨덴의 6월 하지 축제를 찾으며 전개된다. 백야가 이어지는 생경한 곳에서 기이한 공동체와 함께 생활하며 그들은 곧 끔찍한 상황에 놓이게 되지만, 결국 아무도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일종의 위로와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공포 영화를 혼자 본다는 건 기본적으로 나 같은 겁쟁이에게는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럼에도 괜찮았던 것은 어쨌든 두 번째 본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가 가진 공포영화임에도 공포영화스럽지 않은 특징들 탓이다. ‘공포’란 무릇 ’알지 못함‘에서 비롯된다. 저 문 너머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르는데서 오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생경한 공간에 놓인 경우처럼 말이다. 해답이 없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도무지 해결책을 모르는 경우 발생하는 공포도 있겠다. 미지의 존재나 세계,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구덩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대다수 공포 영화들은 이러한 설정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주인공은 악령이나 괴물, 살인마에게 쫓기며 도망치거나 숨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들과 맞닥뜨린다. 그 과정의 긴장감과 순간의 놀래킴을 통해 공포를 삽입한다.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은 물론이거니와 영화 밖 관객의 무지를 위해 공포 영화는 주로 어두운 화면에서 사건을 진행시킨다.
반면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환한 대낮에, 그것도 탁 트인 야외가 주 무대다. 그 설정을 바탕으로 영화는 알지 못함에서 비롯된 깜짝 놀람이 아닌, 예측되고 예상되는 사건이나 상황이 여지없이 닥쳐 옴에 따르는 처참함의 공포를 선사한다. 영화의 도입부인 대니 가족들의 죽음은 충분히 예상된다. 대니는 조울증을 앓는 동생과 연락이 닿지 않아 전전긍긍하며 은연중에 비극을 예상한다. 물론 관객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슬로모션으로 적나라하고도 무겁게 촬영된 그녀 가족의 죽음과, 대니의 짐승처럼 울부짖는 통곡 소리를 기분 나쁜 현악 소리에 키를 맞춰 교차 편집하며 관객에게 몸서리쳐지는 공포를 안긴다.
영화에서 충격적인 사건과 장면들은 모두 예상되는 일들이 여지없이 일어나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각인된다. 축제를 위해 방문한 스웨덴 공동체 속 72세가 넘는 노인은 죽는다는 이야기를 슬쩍 흘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노인이 절벽 위로 오른다. 관객은 설마 하지만 그들이 뛰어내릴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웬만한 영화에서 보기 힘든 훌륭한 수준으로 촬영된 매우 끔찍한 추락 씬이 이어진다.
공동체 마을에 축제 장식처럼 걸려있는 그림 속 러브스토리는, 이후 대니의 남자친구를 대상으로 한 공동체 속 갓 성인이 된 여성의 유혹으로 펼쳐진다. 결국 그에 넘어간 남자친구를 목격하는 대니의 절규가 영화 후반부에 클라이맥스처럼 펼쳐진다. 그 장면 역시 대니는 이미 직감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그녀는 그가 자기를 떠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혈육을 잃은 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남자친구뿐이기에 결국 스웨덴까지 그를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듯 한 다른 남자에게 이끌림을 부정과 동시에 의식하며 축제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만난 괴이한 공동체로부터 처음에는 경악하고 벗어나려 하지만 스스로 목숨도 버릴 만큼 엄격한 규칙을 바탕으로 형성된 그들의 자장에 갇히게 되고, 서서히 그곳의 여성들과 융화되기 시작한다. 결국 서바이벌 강강술래(?)를 통해 축제의 꽃인 ‘5월의 여왕’ 자리에까지 오르고, 그 순간 자신을 배신한 남자친구를 목격하고 괴로워한다.
그런 대니를 둘러싸고 그녀를 감싸며 함께 울부짖는 공동체 여성들의 모습은 처음 기이함을 넘어 상황이 좀 웃기다 싶은 순간, 대니와 그녀들이 정말 웃고 있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읽힌다.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은 대니가 5월의 여왕 자격으로 공동체의 신에게 남자친구를 재물로 바치며 그를 태워 죽인다. 그렇게 자신의 의지로 기존의 가족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을 맞게 된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는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 속 대사인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라는 명제에 관한 이야기로 보이기도 하다. 영화 속 비극의 필연성은 공동체가 가진 강력한 규율과 그것을 철저히 믿고 따르는 구성원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곳으로 들어온 소수의 외지인들은 그 낯설고 충격적인 시공간 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참극과 맞닥뜨린다.
이런 일종의 운명론적 관점은 감독의 전작인 ‘유전’에서도 읽을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집의 미니어처를 훑는 첫 장면과, 영화 마지막에 악마와 그를 숭배하며 엎드린 이들의 공간인 오두막을 미니어처로 표현한 장면은, 마치 우월한 존재가 원하는 대로 이 상황을 일찌감치 정해 놓은 느낌을 준다. 맞설 수 조차 없는 존재들이 철저한 계획 아래 대를 이어 이뤄지는 막강한 저주 앞에 완전히 굴복당하는 가족의 이야기임을, 영화는 처음과 끝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미드소마’ 역시 첫 장면에서 마찬가지 의도를 내비치는데, 화면을 꽉 채운 그림을 잘 보면 영화의 대략적인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곧 이 영화 속 이야기는 이미 예정된 것이며 결코 바뀌지 않을 것임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그것을 받아 안은 자가 유일하게 살아남는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점도 동일하다. 한 명은 악마가 되고, 다른 한 명은 기이한 공동체의 여왕이 되지만, 어쨌든 둘은 혈육으로부터 받은 이전의 고통에서 벗어나 각각 신봉자들과 새 가족을 맞이하며 일종의 치유와 구원을 얻는다.
특히 대니는 심리적으로도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에스컬레이팅 된다. 가족을 잃은 밑바닥에서 출발해 공동체에 섞이고 함께 춤을 추며 절정으로 치달은 후, 결국 그곳의 여왕이 되는 과정은 마치 고난을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난 일종의 성장기와 같은 구조를 띤다. 어떤 테스트에서 유일하게 통과한 자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니와 함께 방문한 외지인들은 탈출하려거나, 공동체를 욕보였거나, 그곳을 연구한답시고 룰을 어김으로써 모두 죽임을 당한다.
오직 그녀만이 추락한 두 노인과 그들의 죽음을 돕는 공동체 일원들을 보며 자신의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와 직면했고, 그들의 위로와 보살핌에 반응했으며, 그들과 기꺼이 어우러지는 과정을 겪으며 살아남았다. 스웨덴에서 겪게 되는 그 모든 참혹한 장면과 괴이한 일들은, 결국 절망으로부터 대니를 위로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과정인 셈이다.
그 밖에도 스웨덴의 공동체는 꽤나 흥미로운 설정이다. 기본적으로 원시 공동체이며 사이비 종교적인 색채를 덧입혔다. 환각을 보고, 예언을 믿고, 조상을 섬기며, 이에 대한 모독이나 어김이 있을 시 가차 없이 살인하고 모두가 이를 철저히 숨긴다. 연기하는 듯 한 어색함도 있지만 심지어 감정이나 고통을 나누는 듯 함께 표현한다. 그들이 쓰는 언어나 동작들을 꼼꼼히 설계했고, 건축물 세트도 정교하고 훌륭하다. 분명 많은 상징들을 숨겼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라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만큼 정성스럽게 만든 장치들이다.
아내에게 보여 줄 영화의 감상은 여기까지다. 그녀가 내 정성과 노력을 알아줄까? 이 글을 읽고 영화의 평가를 바꾸게 될까? 아니리라. 되려 왜 자신을 영화에 아무런 조회도 없는 사람처럼 묘사했냐며 꾸짖을 것이다. 그렇다. 이 글을 발행하고 아내에게 공유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등골이 오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