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전체 생산직 중 대략 1/4 정도가 외국인 노동자다. 그리고 전원이 '스리랑카'인이다. 몸을 써 가며 반복되는 일을 해야 하는, 그것도 맞교대로, 그렇다고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 깨끗하지도 않은 근무 환경인 조그만 재하청 공장에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기 만무하기에, 많은 비중을 외국인 계약직으로 채워왔다. 한 번 입사한 친구들은 보통 2년 정도 계약을 하고, 5년을 한국에서 보낸 뒤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구조. 그러다 보니 그간 많은 스리랑카 친구들을 맞이하고 친해졌다 다시 떠나보내는 과정을 꽤 반복해왔다.
전반적으로 내가 만난 스리랑칸들은 참 착한 친구들이다. 대부분이 나보다 어린 축이지만, 그들의 어깨에는 이역만리 떨어진 조국에 사는 그들 가족의 생계가 걸려있는 것 또한 대부분이다. 똑같은 입장이라도 내가 과연 스리랑카에 혼자 가서 5년을 일만 하다 올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선 안쓰러움을 넘어 존경심마저 들기도 한다. 고향에서 똑같은 시간 일해 버는 돈의 몇 배를 벌 수 있다는 그것 하나로 이 먼 타지까지 와서 힘들게 일하지만, 대부분 밝은 얼굴로 서로를 대하며 같이 일하는 한국인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다.
하지만 이들을 향하는 차별과 멸시는 분명 존재한다. 우리말이 서툴다 보니 자신이 내뱉는 폭언에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몇몇 한국인들이, 함부로 스리랑카를 폄하하고 그들의 문화를 업신여긴다. 관리자들이 자신의 스트레스와 짜증을 공장 내 가장 약한 계층인 이들에게 쏟아내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기도. 그리고 그들에게 욕을 하거나 함부로 대하지는 않지만, '계약직 스리랑카인들은 한국 사람보다 열등한 존재들'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분명히 있다.
얼마 전 미국의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다시 뜨거워진 인종차별 문제를 뉴스로 보다가 자연스럽게 스리랑카 동료들을 떠올렸다. 유명인들을 필두로 많은 대중들이 흑인 인종차별을 반대한다는 내용. 하지만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구의 백인 우월주의나 유색인종 차별주의에서 벗어나 전 인류를 편견 없이 대하는가? 과연 나는 차별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가? 스스로에게 묻게 되니 역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회사가 어려우니 외국인 보단 당연히 우리 한국인이 먼저'라며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 게 사실이다.
공장의 노동자들 스스로가 이 곳을 바닥이라 여긴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세상이란 울타리 속 가장자리라 믿는다. 위태로운 자신의 위치를 안쪽으로 가져갈 수 없다고 믿기에, 어떻게든 지금의 자리라도 보전하고 싶어 한다. 힘을 모아 울타리 속 모두의 간격을 좁혀 가장자리에서 멀어지는 모두에게 좋은 방법 대신, 가장자리 속에서도 나보다 약한 존재를 찾아 그들을 더 바깥쪽으로 밀어버린다. 정규직은 계약직을, 상급자는 하급자를, 남자는 여자를, 한국인은 외국인을 밀어냄으로써 자신의 안녕을 도모하는 곳. 슬픈 이야기지만 이 작은 공장에서 벌어지는 일상이기도 하다.
올해 봄, 오랜 시간 같이 보아 온 스리랑카 동생이 한국을 떠나게 되어 아쉬운 마음에 회사 밖으로 불러내 밥을 사 주었다. '사미라'란 이름의 그 친구는 6년 전 여름, 내가 처음 이 공장에 왔을 때,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어벙 벙한 상태의 신입인 나를 데리고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었다. 작은 키에 단단한 체격, 구불구불 곱슬머리에 조금 지쳐 보이는 커다란 눈, 야무지게 일 잘하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던 녀석. 당시 그는 임신한 아내가 스리랑카에 있었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종잣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었다. 나의 공장 생활이 어느 정도 적응하는 단계에 들어갈 때쯤 그는 아빠가 되었고, 그의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다. 가끔 힘들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그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해주기도. 그렇게 버티고 버텨 계약 기간을 끝내고 그는 스리랑카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이제 숙련된 공장 노동자로 탈바꿈 한 내 앞에, 사미라는 짧게 자른 머리로 다시 짠 하고 나타났다. 너무 놀라고 기뻐 부둥켜안고 안부를 물었던 기억. 돈이 더 필요해서 또 왔다는 그의 얼굴에는 차마 드러내고파 하지 않으려는 여러 감정이 겹쳐 보였다. 그때 이미 느꼈던 것 같다. 이 녀석, 곧 다시 돌아가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재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퇴사를 결심했다. 비행기 타기 이틀 전, 함께 인도 요리를 먹으며 서로의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었다. 아내와 딸이 보고 싶어 더는 안 되겠다며, 섣불리 다시 한국으로 온 것을 후회했더랬다. 나는 놀리 듯 물었다.
"에이, 사미라. 그러다 다시 한국 오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안 와요 형님. 안 올 거예요. 회사 사람, 좋은 사람 있어요. 근데 나쁜 사람도 많아."
그가 한국을 떠나려 마음먹었던 건, 가족을 향한 그리움만은 아니었다. 농담이랍시고 던지는 한국인들의 모욕적인 언행들이나, 작은 실수나 잘못에도 지나치게 자신과 스리랑카 동료들을 혼내는 것에 대해 마음을 많이 다친 모양이었다. 앞에서는 잘 못 알아들은 척, 별 일 아닌 척 웃고 넘겼지만 속으로는 아니었던 것. 다행히 형님은 좋은 사람이라며 껄껄 웃는 그 앞에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었더랬다.
요즘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스리랑카로 돌아간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나 보기도 하고, 연락도 손쉽게 할 수 있는 편. 그러다 보니 몇몇은 아직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다른 나라의,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활을 하는 이들과 형 동생 하며 지낸다는 게 뭔지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 지금 당장 스리랑카에 떨어진다 해도, 난 괜찮을 것 같은 믿음 같은 거랄까?
"형님, 스리랑카 놀러 와. 그냥 와. 먹고 자고 구경까지 다 시켜줄게."
학교에서 수학선생을 하다가 한국으로 왔던 두마르, 수염을 멋지게 길렀지만 원체 어려 보이는 외모와 작은 키 탓에 '슈퍼마리오'라 불렀던 니란거, 활짝 웃는 얼굴로 늘 친절했던 기스리, 인터넷으로 매일 같이 물건들을 사서 택배로 받던 진중한 성격의 루안. 모두 하나같이 스리랑카에서의 가이드를 약속했으니 믿어야지 어쩌겠나. 형이 돈 모아서 가족들 데리고 5년 안에 꼭 간다며 사미라에게도 호언장담 했는데...... 내 자금 사정도 그렇고, 코로나19 때문에 비행기 타고 외국 나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래도 진짜 한 번은 가보고 싶다.
녀석들 다시 볼 수 있다면 정말 반가울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