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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버팀글 Jun 16. 2020

난 왜 하필 지금 레트로인가?

감상 단편

  레트로의 홍수다. 현실에 비관적이면 과거지향적이 되듯, 2020년 지금의 삶이 여러모로 힘겹고 팍팍하다 보니 가장 흥청망청하던 시절의 유행과 문화를 추억하고 되새김질하는데 여념이 없다. 돌아보니 나도 요즘 이 현상의 바다에 풍덩 빠져 헤엄치는 중. 심지어 티비를 잘 보지 않는데도, 최근 '비'와 '이효리'가 90년대 유행하던 혼성댄스그룹을 재현하는 '놀면 뭐하니'를 즐겁게 시청 중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굳이 나까지 레트로를 찾는 거지? 찬란히 꽃피던 대중문화의 수혜를 마음껏 누린 세대로서 예전 그때가 그리운 것도 일부 있겠지만, 내 취향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기에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평소 너무 화려하고 개성 강한, 알록달록 한 이미지들이 그저 촌스럽다 여길 뿐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레트로에 빠진 이유는 다름이 아닌 이 '색(color)'에 대한 갈증 탓이었다.


 대한민국 40대 아저씨답게 튀지 않는 색상의 옷을 입고,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한다. 회색의 작업복을 입고 하루 종일 그야말로 무채색의 향연이라 할 만한 공장에서 일을 한다. 이 곳의 색이란 바닥의 초록과 그 위에 그어진 경계선의 노란색 정도. 이러니 절로 감성이 메마르고 개성이 축소될 수밖에. 시간이 갈수록 생각보다 이런 점들이 내게는 큰 문제로 다가왔다. 비록 통제된 공간에서 반복적인 일을 할 지언 정 자유로움과 창의성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최근 온전한 나로 사는 삶을 고민하게 되며 불쑥불쑥 올라오게 됐다. 그 속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 '총천연색' 레트로를 마구 섭취하는 중이었던 것.


 그래서 이제부터 이야기할 두 가지 콘텐츠가 바로 이러한 나의 욕구를 가장 충실하게 채워 준 것들이다. 8,90년대 유행했던 문화를 제대로 재현함은 물론이고, 그 시절을 모르는 지금 세대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신박하고 세련된 거리들이다. 당연히 너무 많은 이들이 보고 들은 것들이지만, 어쨌든 내게는 색을 향한 목마름, 무색의 삶이 싫은 개인적 욕구와 부합했단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1.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출처 daum 이미지

 80년대 미국, '홉킨스'라는 어느 작은 마을에 제목 그대로 '기묘한' 현상이 발생하고, 그 속에 휘말린 사람들의 모험과 성장을 다룬 이야기를 현재 시즌 3까지 풀어냈다. 아이들이 주축이 되어 끌고 가는 이야기인지라 그들의 풋풋하고 어설프지만 때로는 어른들보다 더 현명하고 똑 부러지는 면모로 미스터리를 해결해 가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뿐만 아니라 주축인 아이들의 형과 누나, 그리고 부모들이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함께 위로하며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한바탕 모험 속에 적절히 녹이면서 다양한 세대의 즐길 거리로 만들었다. '구니스'나 '쥬만지' 같은 8,90년대 가족 어드벤처물을 즐겨봤던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재미를 보장할 듯.


 돋보이는 건 역시 80년대 청소년들 사이 유행했던 여러 요소들. 원색의 알록달록한 의상들과 힘이 잔뜩 들어간 헤어스타일, 오락실이나 대형 쇼핑몰 등 조명이 번쩍거리는 휘황 찬란 한 세트 등은 당시의 모습들을 제대로 구현한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갖는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다채로운 색감으로 표현하는데, 이때 한몫하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신스팝'이라 불리는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그때는 세련되고 획기적이었던 '몽환적인' 사운드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이야기의 질감을 한층 더 끌어올림과 동시에 레트로 콘텐츠로서의 자아도 확고히 다져준다.


 2. 더 위켄드(The Weeknd) 'After Hours'

출처 daum 이미지

 앞서 이야기 한 '신스팝'에서 연장된, 개인적 감상으로 올해 최고의 명반인 '더 위켄드'의 정규 4집 앨범 'After Hours'가 다음 이야기할 작품이다. '기묘한 이야기'가 시각적인 색감을 선사해줬다면, 위켄드의 이번 앨범은 소리를 통해 온갖 색을 들려줬다고 해야 할까? 전 트랙을 듣는 동안 신스팝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불안하고 흔들리는 듯 부르지만 분명 섬세하고 명확한 보컬이 합쳐져, 듣는 이로 하여금 마치 뭔가에 홀린 채 노래에 붙잡혀 끌려 다니게 만든다.


 출퇴근길 차에 올라타 앨범 타이틀 곡 'Blinding lights'를 플레이하고 자동차 시동을 건다. 약간은 신비롭고 몽롱한 느낌의 도입부를 지나 템포 빠른 디스코 비트가 시작될 때 액셀을 밟아 차를 움직이는 그 순간, 늘 다니며 보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다. 밋밋한 색감의 건물들과 항상 그 자리에 선 오래된 나무들이 사라지고, 수만 가지 온갖 색의 빛줄기가 차로 달릴 저기 저 앞 어느 지점을 향해 곧게 뻗어나간다. 속도가 붙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그 짜릿한 기분이 굉장히 좋다. 단 노래에 너무 취하면 과속할 위험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일 할 때도 가끔씩 이어폰을 통해 들으면 잿빛의 공장에서 마치 네온사인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어딘가로 나를 옮겨다 놓는 느낌이다. 그만큼 사운드를 향한 몰입도가 높은 완성도 있는 앨범이다. 80년대 감성을 제대로 살리면서 현재 가장 세련된 레트로 작품이라 감히 칭하고 싶다.




 올 초에 새 스마트폰을 '빨간색'으로 구입했다. 이십 년 전 휴대전화란 걸 처음 쓰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그것들은 늘 검은색이었다. 휴대폰은 블랙이 진리라는 오랜 고집을, 근데 이번에 꺾게 될 줄 몰랐다. 심지어 빨간색이라니, 이건 큰 변화라 여길만 하다. 얼마 전엔 혼자 옷을 사러 갔는데, 점원이 요즘 잘 나간다며 추천해 준 아무런 프린팅도 없는 새하얀 티셔츠를 뒤로 하고, 원색의 그림이 가슴팍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걸로 집어왔다. 그뿐 아니다. 코로나19를 막아낼 마스크는 흔한 하얀색 대신 'Nineteen'이란 영문자가 쓰인 샛노란색 제품을 즐겨 쓰는 중이다.


 확실히 튀고 싶나 보다. 오히려 어릴 땐 어떻게든 밋밋하려 애썼는데, 나이가 먹고 생활환경의 컬러가 너무 척박하다 보니 반대로 색깔을 찾게 되나 보다. 이런 변화를 나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나만 특별히 무색의 공간을 사는 건 아닐 듯하다. '개성 없음'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이라 여기는 대한민국에선 더더욱 그러지 않을까?


 나를 포함한 모두가 지금보다 찬란할 필요가 있다. 각자의 색으로 각자의 삶을 용기 있게 칠할 수 있는 시대를 꿈꿔본다. 더 많은 색을 그 어떤 곳에도 구애받지 않고 덧칠할 수 있는 활력 있고 자유로운 삶을 살 길, 그런 사회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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