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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Feb 08. 2022

동생의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 에세이

시간을 거슬러보면 10년 세 모녀는 병과 사투를 벌였다. 2012년 그 해는 지옥과도 같은 날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해 그날을 떠올리면 세 모녀는 진저리를 친다. 지금은 그 병으로 동고동락하며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근데 병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년 만에 연락이 닿은 동생은 울면서 엄마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3년 전 자신이 한 행동으로 가족들에게 상처를 남겨 병이 재발되었다며 말을 했다고 한다. 후회와 자책으로 동생은 벌 받았다고 했다. 


그날은 내가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멍하니 있을 때였다. 자가격리 중이니 우리 집 오지 말라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던 그때 엄마에게 동생이 연락 왔다고 병이 다시 찾아왔다고 엄마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용서했다.


동생 수술 소식을 접했을 때 10년 전 과거가 떠올랐다. 혼비백산한 엄마의 목소리, 아직 회복이 덜 된 나, 수술로 인해 회복 중이던 엄마, 그리고 수술을 앞둔 동생. 그렇게 우리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저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를 견디고 이겨냈다.


동생의 수술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수술이 끝나고 일주일 만에 퇴원을 했다. 수술 후 10년 만에 재발이 된 동생 병은 그때처럼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 한 명만 가능한 대형병원은 제부만 허락했다.


우리는 부산에서 기도를 하고 또 하며 경과가 좋기를 바랐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즐겁고 재미나게 즐기기로 했다. 설 연휴 동안 좋은 일만 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신에게 기도를 했다. 제발 이번만 잘 넘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너무 간절해서 그럴까? 실망도 컸다.


설 연휴 끝난 다음 날 동생은 조직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 한 없이 가라앉은 동생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예감했다. 결과가 좋지 않다는 걸. 세 모녀는 행복도 불행도 함께 했다. 아파도 같이 아팠고 행복한 일이 있으면 다 같이 행복한 일만 터졌다.


작년 가을 내가 앓고 있던 병이 재발되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장 내시경으로 독한 약을 처방받았다. 한 달 반 정도 추가된 약을 복용하면서 병은 호전을 보였다. 이내 엄마의 좋지 않은 의사 소견까지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동생의 재발 소식을 접했다.


울먹이는 동생이 안쓰러워서 마음이 찢어져서 한 동안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환자인 동생 심정만큼 나는 세상이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는 목소리로 어쭙잖은 위로는 동생에게 도움 되지 않을 거 같아서 없는 힘을 쥐어짜며 말을 했다.


"그래 실컷 울어. 울어야 속이 시원하다면 얼마든지 울어" 한동안 우는 소리에 가슴이 찢어졌다. 진정이 된 동생에게 물었다. "앞으로 치료 방법은 뭐야?"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어" "항암치료를 하면 혹은 사라지는 거야" "아니, 몰라 치료를 해야 결과를 알겠지. 언니야 나 4기래" 나는 4기라는 소리에 머리가 띵했다.


분명 동생은 수술하기 전 2기라고 했다. 종양이 아닌 그냥 혹이라고 했다. 근데 조직검사에서 4기인 종양을 발견했던 것이다. 말을 잇지 못하는 언니의 심정을 알았는지 동생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4기가 말기라고 했어 교수님이.."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동생과 제부 심정은 어떠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 얼마나 살 수 있다고 하던데" "2년" 덤덤한 말투 속에 가슴이 내려앉은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항암 치료를 하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안고 입을 열었다. "항암치료를 하면 2년보다 더 살지 않을까?" "그건 몰라. 항암 치료하는 교수님에게 물어봤는데 답변을 안 해줬어" "그건 주치의에게만 말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분은 뭐든 말해줬어. 근데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답도 해주지 않아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자매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힘내라는 말도 파이팅이라는 겉치레 응원은 동생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거 같았다. 나는 잘 안다. 아픈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곁을 지켜주며 그 아이의 말을 들어주면 위로가 된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동생의 숨소리만 들었다.


2월 3일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날이다. 우리 가족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항암치료는 약으로 대신한다고 했다. 한 달에 한번 병원을 찾아 경과를 지켜보며 6개월에서 9개월 정도 항암치료를 이어간다고 했다.


우리는 병에 질 수 없었다. 10년 전 고통을 상기시키며 동생에게 말을 했다. "너, 아이 커서 성공한 모습을 봐야 하고 그 아이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모습도 봐야 하잖아" "응" "그럼 지금은 항암 약이 몸에서 잘 적응하기를 바라자. 예전처럼 버티고 일어나기를 바라자. 그 길이 가장 현명한 거 같아. 항암 약을 먹으면 힘들겠지만, 죽는 것보다 나지 않을까" "그래 언니야. 내가 힘 내볼게" 애써 기운을 차리고 애써 웃으며 말하는 동생이 안쓰러워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그 후로 우리는 통화를 하지 않았다. 항암 약으로 온몸에 있던 힘이 빠졌고 동생은 전화를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전해 들은 소식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2년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아니 일어날 힘이 동생 안에 있다. 나에게는 그 아이를 도울 힘이 있다. 


온 가족이 그 아이를 위해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또 기도를 한다.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약이 몸에 잘 받아 종양 크기가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뿐이다. 누구나 죽는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

헌데 동생은 40대 초반이고 고등학생 아이가 있는 엄마라서 이 세상 끈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제 아무리 죽을병에 걸렸다 한들 마음만 굳건히 먹는다면 죽을병 역시 그 몸에 오래 머물 수 없는 환경이라 잠시 떠나고 만다. 너무나 간절하면 실망이 크다. 간절하게 기도했던 설날. 이제는 간절하지 않게 현재에 맞게 기도하고 또 기도해본다. 2년이 아닌 20년을 거뜬히 살 수 있는 동생을 위해 글로 기도를 한다.


"효나야 늘 그렇듯 우리는 다시 살 수 있어. 하나뿐인 조카를 봐서라도 잘 견디기를 이 언니가 기도하고 기도할게. 우리 이 위기를 잘 극복하자. 너 할 수 있지? 나도 할 수 있어. 10년 전 기적처럼 살았던 것처럼 말이야. 이 또한 지나가고 다시 살아 숨 쉬며 너와 내가 웃으며 지내고 있을 거야. 10년 전에도 2년에서 3년 살 수 있다고 했잖아. 근데 10년을 살았어요. 이 위기를 잘 극복하면 20년을 살 거야. 멀리서 언니가 기도하는 거 잊지 마.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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