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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Apr 20. 2022

20대 나의 꿈 승무원이었다

엄마 에세이

글을 쓰다 보면 오래전에 꿈꿔왔던 꿈이나 미래가 떠오른다. 며칠 전 어릴 때 내가 그리워했던 승무원 꿈이 생각났다.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비행기가 부러웠다. 답답한 현 상황을 털어버릴 수 있는 방법이 어린 마음에 생각한 것이 바로 승무원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세상이 두려웠고 무서웠다. 온갖 부정적인 에너지와 말들로 그 꿈은 정말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머릿속에 남김없이 사라졌었다. 승무원을 보면 "그들은 쉽게 다른 나라를 다니며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집이 편안하면 근심 걱정이 없었을 텐데 집에만 오면 근심 가득한 엄마 얼굴이 그때는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런 엄마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만의 상상을 했다.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직업이라면 집안 걱정 안 할 수 있을 텐데, 그 방법은 승무원이 되는 길 말고는 없다"라며 귀동냥을 했었다. 스튜어디스가 되려면 그때 당시에는 키와 얼굴 기준이 있었다. 그리고 언어가 중요했다. 그중 영어는 기본 중 기본이었다. 결국 이 모든 기준이 미달이라는 걸 알게 된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키는 평균보다 작았고 언어에는 자신이 없었다. 한계란 한계를 만들며 안 될 것부터 기준으로 세우고 '이래서 난 안 돼, 저래서 난 안 돼' 말로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에라이! 되든 안되든 한번 부딪혀보는 거지' 생각으로 덤덤히 세상 밖으로 걸어갔을 것이다. 20대 나의 꿈 하나가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채 숨어있었다. 더는 미련이나 후회하지 않기 위해 40대 꿈을 하나씩 꺼내어 실현해본다. 현재에 집중하면 아무래도 내가 이루고 싶어 하는 꿈은 쉽게 잡을 수 있다. 20대는 부모님 그늘에서 부모님이 안 된다고 말하면 이내 포기해버렸지만 40대 지금은 부모 그늘이 아닌 내가 스스로 세상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승무원 꿈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 꿈을 꾸었던 그때는 참 행복했었다. 커리어우먼 같은 나를 상상하며 그려보면 그 시간만큼은 늘 행복했고 내가 멋져 보였다. 그런 이상을 꿈을 꾸며 삶을 버티고 버틴 힘의 원천이 되었다.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환한 웃음으로 세상을 밝히겠노라고"다짐했던 순간순간이 필름처럼 보였다. 지금 아이에게 원 없이 뭐든 해보라고 한다. 발레면 발레, 미술이면 미술, 피아노면 피아노를 해보라고 한다.


아이는 유치원 다니지 않은 동안 발레와 미술, 피아노까지 배우며 행복해했었다. 아이 힘찬 발걸음이 예전 내가 가지지 못한 발걸음이라는 걸. 나 대신 아이가 그 힘찬 발걸음으로 세상을 배우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결핍은 부모 밑에서 살면서 다양한 형태로 다가왔다. 먹는 것부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핍을 안고 성장한 것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의 결핍이 어디에서 온 건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배움에 대한 결핍을 아이만큼은 배움에 대한 열정을 '돈이 없어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엄마가 아파서' '너는 어려서' 무너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너의 체력이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엄마는 너를 지지하고 응원하겠다는 메시지만 가득 담아 안겨주었다. 나의 엄마가 했던 다양한 핑곗거리를 대지 않았고 남들이 다하는 그런 직업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그런 엄마를 닮지 않은 나는 나의 직업도 내가 선택하며 살려고 한다.


친정엄마 뜻이 아닌 내 뜻대로 말이다. 그래서 지금이 행복하고 감사하다. 원 없이 글을 쓰고 원 없이 배우고 원 없이 길을 찾는 것이 즐거운 일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나에게 맞는 직업은 주부가 아닌,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닌, 한 집안의 며느리가 아닌, 한 가정의 맏이가 아닌 오롯이 내 이름 석자를 내밀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사실 부양가족으로 살아가는 삶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냥 그 속에 튀지 않으려고 부지런함을 떨었을 뿐.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 상처를 주며 아파했다. 


배움을 갈망하는 마음을 숨기기 위한 일시적인 방패 역할은 아마도 적성에 맞지 않은 일에 온 힘을 다해 부지런을 떨었던 것이다. 20대,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승무원 꿈이 접어지자 곧이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다. 돈을 낭비한다는 엄마의 반대에 물러서지 않고 한 달만 배워보겠다고 했다. 직장을 다니며 늦은 밤 배움을 선택한 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계속 배우자니 친정엄마 눈치가 보여서 한 달만 배우고 "메이크업 중노동이야. 내 얼굴 메이크업은 잘하겠는데 다른 사람 얼굴에 화장을 해준다는 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직업이었다며" 스스로 포기했다.


이 모든 포기는 돈이 문제였다. 월급은 고스란히 친정엄마 손에서 나오지 않았다. 재료비를 구입해야 하는데 매번 돈 달라는 소리를 못할뿐더러 한 달 용돈을 받아쓰는 직장인은 여윳돈이 없었다. 두 번째 꿈이 좌절되었다. 두 번의 꿈이 좌절되자 꿈은 허상이라며 더는 꿈같은 건 꾸지 않고 살아갈 거라고 다짐했다.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맞다고 내가 나를 세뇌했다.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어서 꿈만 꾸는 거라고 어른들이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른들이 틀렸다. 환경이 되지 않았을 뿐. 꿈을 꾸면 어떻게든 이루어진다는 걸 알았다. 결과물이 늦어졌을 뿐. 이제는 승무원의 꿈은 그림움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살아야 할 희망의 원천일 뿐이다. 승무원을 그리워했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다시 꿈이라는 걸 꾸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꿈은 희망이었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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