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마리 퀴리
과학은 남자들의 학문인가? 21세기인 지금에는 많은 여성들도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서 이공계에서 종사하거나 공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전반적인 사람의 숫자는 분명히 남자가 더 많다. 현대에도 아직까지 이런 이미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서 미뤄보아 알 수 있듯이 과거 과학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먼 옛날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100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에 대한 고등 교육이 제공되기 시작했음에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성의 학계 진출에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이번에는 당대의 차별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상 중 하나인 노벨상을 그것도 두 번이나 수상한 마리 퀴리를 다룬다. 마리는 1903년 "앙리 베크렐이 발견한 방사선에 대한 공동연구"의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라듐과 폴로늄 원소의 발견, 라듐의 분리 및 라듐의 성질과 화합물에 대한 연구"로 191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20년이 넘어가는 노벨상의 역사에서도 한 사람이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사례는 단 4번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마리는 최초의 2회 수상 및 최초의 여성 수상이었다.
마리의 결혼하기 이전 이름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였다. 마리가 태어나고 자란 폴란드는 당시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문제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환경에 더해 마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당시 독일과 폴란드는 여성의 대학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는 조국인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파리에서 마리는 금속의 자기적 특성을 연구로 과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때 피에르 퀴리를 처음으로 만났다.
과학에 대한 열정을 시작으로 둘은 빠르게 가까워졌지만 마리는 폴란드로 돌아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피에르의 청혼을 거절했지만 피에르는 자신의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바르샤바로 퀴리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파리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이후 마리는 피에르보다 먼저 폴란드로 돌아왔으나 마리의 기대와 달리 크라쿠프 대학은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마리의 박사 과정 진학을 거절했다. 이때 피에르는 마리가 파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도록 설득했으며 결국 파리로 돌아온 마리는 그곳에서 피에르와 결혼했다. 당시 결혼식에서 마리는 순백의 웨딩드레스가 아닌 진청색의 실험실 드레스를 입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마리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피에르와 결혼할 무렵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앙투안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한 시기였다. 당시 물리학계는 뢴트겐의 X-선에 관심이 많았지만 베크렐 방사선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마리는 이러한 학계의 흐름과는 반대로 우라늄이 외부에서 에너지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 빛을 방출한다는 발견에 큰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마리는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우라늄의 방사선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피에르가 발견한 압전 효과가 우라늄 방사선의 세기를 측정하는데 큰 도움이 됐었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연구에 좋은 환경이었다.
당시 베크렐은 우라늄이 고체 상태이던 가루 상태이든 간에 또는 우라늄이 순수한 형태로 정제되어 있든 화합물 상태로 광물에 있던 간에 방출되는 방사선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여기에 더해 마리는 우라늄 화합물의 방사선 세기를 측정했고 우라늄의 함량이 높은 광물일수록 강한 방사선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마리는 방사선이 우라늄 원자의 구조에서 오는 원자 자체의 특성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 가설은 매우 중요했는데 원자 중에 스스로 에너지를 균일하게 방출하는 원자가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피에르 또한 마리의 가설에 큰 흥미를 느끼고 기존에 하던 연구를 중단하고 마리와 함께 방사선 연구를 시작했다.
우라늄 원자 자체가 방사선의 원인이라는 마리의 가설에 따라 우선 피에르와 마리는 우라늄이 함유되었다고 알려진 여러 광석의 방사선을 측정했다. 이미 순수한 우라늄의 방사선량은 베크렐의 결과를 통해서 알고 있었고 대부분의 광물들은 딱 광물에 포함된 우라늄양만큼의 방사선을 내보냈다. 이 결과는 마리의 가설을 지지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마리는 피치블렌드와 토버나이트라는 광물이 함유된 우라늄양에 비해 4~5배에 달하는 훨씬 강력한 방사선을 방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두고 피에르와 마리는 우라늄 이외에 알려지지 않은 방사능을 가진 원소가 추가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우선 둘은 우선 비스무트 분획에서 화학적으로 비스무트와 거의 비슷한 성질을 가지면서 강한 방사능을 방출하는 원소를 발견했다. 둘은 원소에 마리의 고향인 폴란드의 이름을 따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어 바륨 분획에서도 바륨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는 원소를 추가적으로 발견했고 이 원소에는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리는 1903년 6월 자신의 성과를 박사 학위 논문으로 발표했고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이라는 차별은 존재했다. 마리가 박사 학위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퀴리 부부는 영국의 왕립 연구소에 초청됐다. 하지만 여성은 강연을 할 수없다는 관습 때문에 피에르만이 자신들의 업적을 소개할 수 있었다. 피에르는 해당 자리에서 마리의 중요성과 기여를 크게 강조했었다고 전해진다.
뒤이어 1903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베크렐과 피에르를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지명했다. 이에 피에르는 노벨 위원회에 강력히 항의했고 결국 이 항의가 받아들여져 원래 피에르가 받아야 할 상금의 절반을 마리에게 수여함으로써 마리는 최초의 여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됐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에 피에르와 마리는 방사능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고 둘의 건강 상태는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둘은 노벨상 수상식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며 편지로 연설문을 보낸 피에르와 달리 마리는 노벨상 연설문이 없다.
눈부신 업적과 대비되어 둘은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마리는 말할 것도 없고 피에르 또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프랑스의 대학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 편이었다. 다행히도 노벨상의 수상 영예와 상금은 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피에르는 노벨상 수상 이후 소르본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는 데 성공했고 마리는 이례적으로 연구실장이라는 직함을 받아 대학에서 급여를 받는 여성 과학자가 됐다.
더욱이 이 시기에 마리는 암세포가 라듐에 노출된다면 일반 세포보다 더 빨리 파괴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라듐의 의학적인 잠재력이 제안되기 시작했고 퀴리 부부에게 이전의 열악한 환경을 이겨낼 엄청난 부를 쥘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퀴리 부부는 피치블렌드에서 라듐을 분리하는 데 사용한 모든 공정을 상세히 공개했고 이로 인해 라듐 분리 공정에 대한 특허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퀴리 부부는 라듐의 경제적 가능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특허를 내는 것에 반대했고 그 어떠한 공정에 대해서도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
둘이 특허를 신청하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특허를 신청하는데 많은 시간과 돈이 소모가 되기 때문이다. 퀴리 부부는 과학자란 개인적인 재정 문제는 최대한 적은 노력을 들이고 모든 시간과 노력을 인류의 이익을 위한 과학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특허 신청을 위한 업무에 회의적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과학 연구란 과학적 호기심을 위해 수행되어야 하며 산업의 이익을 위해서 행해져선 안된다고 믿었다. 둘은 모든 사람이 연구 결과를 알 수 있도록 공개해야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실제로 둘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물을 동료 과학자들에게, 생산 공정을 산업계에 아낌없이 베풀었다.
이러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비극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1906년 피에르는 음주운전 마차 사고로 인해 갑자기 사망했다. 마리는 심적으로 크게 무너졌지만 피에르가 생전에 했던 말인 "내가 없어져도 마리는 계속 일해야 한다."는 말을 상기하고 다시 과학자로서의 업무에 복귀했다. 소르본 대학에서는 마리에게 피에르의 교수직을 이어받을 것을 제안했으며 마리는 남편을 기림과 동시에 피에르가 일평생 가지지 못했던 첨단 연구 시설을 만들기 위해 소르본 대학의 제안을 수락하고 프랑스 최초로 여성 교수가 됐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교수의 첫 강의에는 학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모여 강의실이 가득 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마리는 결국 1911년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03년에는 우라늄 말고도 다른 원소들이 방사능을 가진다는 사실을 밝혀낸 업적과 피에르와의 협업 과정에서 개발한 방사선의 세기를 측정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주로 인정을 받았다면 1911년에는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이 원소들의 방사능과 관련된 성질에 대한 연구가 인정을 받았다. 1911년 수상으로 마리는 인류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사람이 됐다.
두 번째 노벨상까지 수상하자 드디어 마리의 조국인 폴란드에서도 마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바르샤바 과학 협회는 마리에게 바르샤바에 새롭게 개설될 연구소의 소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마리는 소르본 대학과의 연계로 새롭게 지어질 라듐 연구소에 집중하기 위해 조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라듐 연구소는 후일 퀴리 연구소로 이름이 바뀌며 마리의 지휘 아래에 세계적인 방사능 연구소로 거듭났다. 종국에는 퀴리 연구소에 소속되었던 마리의 딸 이렌 졸리오 퀴리와 사위인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가 193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달성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리는 1934년 방사선 피폭에 의한 빈혈 질병으로 사망해 이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마리는 여성이라는 당시 기준으로 크게 차별받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만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마리의 인생을 조사하면서 어떠한 시련과 차별, 억압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이겨내는 불굴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야 말로 현대의 과학자가 본받아야 할 점이며 과학자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