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더 빨라야 살아남는 거야!
언제부터 모든 것을 빨리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살아온 시절을 되돌아보면 '적자생존', '무한 경쟁'이라는 단어들이 머릿속에도 깊숙이 박혀있던 시절들이 많았다. 학교, 학원, 주변 어른들에게 늘 들어왔던 말, '남들을 앞질러야 성공하는 거야. 지금은 이해 못 하겠지만 나중에는 고마워할 거다'. 그 말이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다'처럼 진리라고 생각했다. 원래 모든 것은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생각한 만큼 보인다. 그런데 과학을 조금 공부해보면 '물은 100도씨에서만 끓는 게 아니라는 진실'을 알게 되는 것처럼 인생을 살면서 어느 시점이 되면 인생에서 빠르기만이 진리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빠르게 살아라'라는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1월에 태어났다. 자연스레 '빠른 년생'이라는 꼬리표를 달았고, 학교도 동년 생보다 1년 빨리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은 남들보다 빠르게 살지 못했다. 주변 친구들이 저학년부터 학원이다 과외다 시작할 때에도 내 머릿속에는 놀 생각밖에 없었다(모두가 그랬겠지... 나는 행동으로 실천까지 했다). 그저 지금 재밌는 것에 더욱 집중했고, 그 시절 가장 깊게 빠진 것은 컴퓨터 전략 게임과 바둑이었다. 두 가지 모두 상대방의 다음 수를 내다보면서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특징을 가졌다. 그리고 나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보는 나만의 전략을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과정을 거치면서 '논리적 사고'의 기틀이 마련된 것 같았다. 논리적 사고의 수준은 특히 어린 시절 크게 성장하고 (퀀텀 점프), 이것은 먼 미래에 '일 머리'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논리적 사고의 기준이 높은 사람은 똑같은 업무를 처리하더라도 '업무의 성공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를 다양하게 만들고, 실패할 경우의 대비한 대안까지 늘 마련해둔다.
예를 들어 (개발자의 관점에서), 회사에서 맛있지만 살이 찌지 않는 빵을 만들라고 시킨다. 누가 봐도 불가능한 업무였다.
A: 말도 안 되는 업무를 시켰다고 주변에 불평을 한다. 일단 이것저것 찾아보고 시도는 해보지만 최종적으로 실패했다는 결과(성실 실패)를 보고한다. 사실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다. 그래서 상사들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가이드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그랬겠지)
B: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처음부터 차선책이 될 수 있는 경우도 생각하서 함께 개발을 진행한다. 원하는 결과는 실패했다고 보고하지만, '엄청 맛있지만 살이 조금 찌는 빵', '약간 맛없지만 살이 찌찌 않는 빵'을 대안으로 만들고, 여러 근거 자료들을 정리하여 새로운 전략에 대한 콘셉트를 함께 제시한다. 개발 직군에서는 대부분 첫 번째 내려온 지시대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위에서 내려온 '소위 뇌피셜'에 담긴 뜻은 정말 그렇게 해라의 뜻이 아니라 '나는 잘 모르겠는데 대충 이랬으면 좋겠는데... 아 몰라 네가 알아서 그럴듯하게 잘 만들어줘'인 경우가 더 많다.
회사의 임원이라면 어떤 사원을 좋아할까?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사원을 더 오래 남겨두고 빨 때를 꽂을까? 이런 업무적 센스는 회사의 중요한 사업을 위한 계획서를 작성하고, 발표를 하고, 실사 대응을 하는 과정들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그런 차이들이 누적되면 회사의 존폐가 흔들릴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짧지만 6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내린 가설일 뿐이고 애초에 타고난 기질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건 서로 입증하기 어려운 내용이니까... 다시 돌아가서, 부모님은 위기감을 느끼셨는지 5학년 즈음에 단과 학원을 보냈는데 그럭저럭 다니긴 했지만 솔직히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 그렇게 어물쩡 다니다가 6학년이 되었다. 하필 그때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초6을 대상으로 학력평가를 실시하였다. 그렇게 치른 첫 학력평가에서 나는 전교 꼴찌의 성적을 받았다. 또래들에 비해 아주 늦은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잘했던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맹모삼천지교라고 부모님은 좋은(?) 중학교를 보내기 위해 이사를 했다. 확실히 좋은 동네로 오니깐 아이들의 성향이 다르긴 했다. 모두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다니는 게 기본이었고,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하는 분위기였다. 과한 친구들은 중학교 1학년에 고등학교 문제를 풀고 있었다. 처음에는 왜 선행학습을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어차피 시험은 중학생껄로 보는데 왜 미리 할까?' 그런데 더 앞선 과정을 공부했을 때, 심리적으로도 그 전 단계가 확 쉬워지는 것도 있고 앞선 단계를 이해함으로써 쉽게 풀리는 내용들이 생겼다. 나도 점점 선행학습이 중요하긴 하구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한 창 놀아야 할 시기에 새벽까지 학원을 다니며 '빠름 중독'에 빠지기 시작했다.
학원에서는 모든 것이 성적으로 통했다. 당시는 학원 선생님들도 체벌을 하던 시절이었다. 성적이 좋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봐주는데 성적이 안 좋으면 무시하고 때리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그 사회에서 학생들은 정말 생존하기 위해 (맞지 않기 위해) 공부를 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선행학습도 많이 하고, 모든 교과서에 화이트 칠을 하고 글자 토씨 하나까지 암기를 하기도 했다. 그 친구는 전교 1등이었는데, 매 시험마다 전 과목 틀린 개수대로 엄마 한태 맞는다고 했다. 그렇게 채찍질을 당하더니 결국 과고를 갔지만 부모님의 과한 집착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들은 끼리끼리라고 상위권은 상위권 친구들끼리 어울린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상위권이 되었을 때 그 친구들도 나를 무리에 불러주었다. 그런데... 내가 하위권 때부터 놀던 친구들과는 사고방식의 차이도 크고 심리 상태가 많이 달랐다. 수행평가 1점에 울고 불고 목숨을 건다. 사소한 것에 아주 예민하여 교우 관계를 깨뜨렸다 (애초에 정상적인 교우관계가 아니었을 수도...). 그들은 스스로의 마음을 지킬만한 내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마음의 여유도). 얘내들이랑 어울릴 수 없겠다고 생각이 들어 그냥 다른 친구들이랑 놀았다.
더 빠름을 추구하는 부모들은 자식을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고 검정고시를 치르게 하기도 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부 고등학생들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시간을 아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취업을 하기도 하였다. 학생들과 청년들은 '미래에 있을 경쟁'에 대비해 '미래의 경쟁자'보다 더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더 빠르게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빠르게 사는 축에 속해서 겪어보니 빠르게 지름길을 감으로써 '시간의 흐름'속에서 깨닫고 배워야 할 가치를 놓치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검정고시를 통해 놓치는 학창 시절의 교우관계와 추억, 이른 취업 준비를 통해 놓치는 대학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 물론 그런 것들을 포기할 만큼 젊은 학생들을 불안하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현재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전 국민이 다 같이 학생 때는 적당히 공부를 시키고 대학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자!라고 약속한다고 사교육을 안 시킬 사람들이 있을까?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 고등학생 때까지 한국 학생들이 엄청난 성과를 보이지만 대학 이후부터는 그 격차가 바로 역전되어버린다. 이제 우리 사회도 과거처럼 좋은 대학만 나오면 끝이 되는 시대가 아니다. 선진국에 반열에 올랐으면, 그 '대학-> 취업의 구조', '의대 만능주의'에만 매몰되지 않고 균형적인 고른 가치들이 추구될 수 있도록 교육적 인식도 따라와야 할 텐데... 그것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는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런 구조에 빠져있었으니...)
마라톤으로 비유하면 한국 학생들은 처음부터 전력질주를 한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왜 달려야 하는지? 혹은 체력이 떨어져서 낙오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개성을 중요한다지만 제일 중요한 인생 레이스에서는 각자 만의 고유 페이스는 처음부터 무시되어왔다.
일단 젊을 때에는 참고 달린다. 빨리 달리고 나면 언젠간 끝이 있겠지라는 희망을 가지고... 하지만 그 희망이 깨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취업을 하고 나면 보이게 된다. 본인이 가고 싶었던 회사에 오니 번 아웃에 빠져있는 대리, 과장, 부장, 임원을 보게 된다. 이것의 내 미래인가? '안정감'을 기대했지만 또 다른 차원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적절한 때가 있다. 그 나이에만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정상적인 흐름대로 나이가 들면 수많은 희로애락의 경험들에서 비롯된 연륜이 생기고, 자연스레 책임감도 생기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된다. 너무 빨리빨리 가면 차근차근 걸어오면서 소화시켜 몸의 영양분들을 흡수할 시간이 부족하다. 애써 먹은 것들도 체하고 뱉어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연스레 생겨야 할 내력이 부족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부담감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거나 마음의 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빨리빨리 살아갈수록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독일 시간이 필요한데 말이다.
그들은 브레이크가 없는 엑셀만 있는 자동차다. 멈추기 위해서는 충돌이 수반되어야 하고 필연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사고가 나기 전에 브레이크를 만들 용기를 내어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