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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준 Jan 29. 2023

영어도 못하는 놈이 무슨 외고를 가겠다고?

3편

나의 유년 시절은 지금처럼 영어유치원이나 조기유학이 대중적인 시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알파벳을 처음 공식적으로 배운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물론 그 당시에도 몇몇 학생들은 개인 교습 과외를 통해 선행학습을 했는지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었고, 수업시간마다 뽐내고 싶었는지 앞서가려고 하고 선생님들을 곤욕스럽게 하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주눅이 두는 마음 반, 아니꼬운 마음 반에 “한국에 살건 데 영어는 왜 배워!?”라며 영어에 대한 반감만 키웠었다.

 

그저 하나의 언어쯤으로만 생각했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영어의 중요도는 계속 높아졌다. 그리고 영어가 수능 과목 중 하나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영어를 무시했던 나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부모님도 영어만큼은 시켜야겠다고 생각하였는지 3학년 때는 영어 그룹과외와 5학년 때는 원어민 단과학원에 보내기도 했었다. 열심히는 아니지만 다른 과목에 비해 영어를 귓 동냥으로 배운 덕에 나름 영어를 조금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종합 학원에서 얻어터지기 전까지는…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신 부모님은 자식들을 좋은 환경의 중학교로 보내겠다고 강북의 목동으로 불리는 중계동 쪽으로 이사를 했다. 중계동에는 나름 교육열이 뜨겁다는 은행사거리라는 곳이 있었다 (사거리를 중심으로 4개의 큰 은행 있었고 학생들은 이곳을 은사라고 불렀다). 

그곳은 큰 대로를 중심으로 양 옆에 줄 지어 선 빌딩들은 모두 학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에는 항상 책가방을 멘 중고등학생들이 바글바글 했고 그들의 허기를 채워줄 분식 포장마차들로 즐비했다. 

은행사거리에는 대형 학원 3 대장이 존재했다. 바로 토피아, 학림, 세일이었다. 

토피아는 외국물 먹는 이름에서부터 느낌이 오듯이 영어 교육에 특화된 학원이었다. 학원 등록을 위해서는 입원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기준도 있었다. 실력이 낮으면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이 점이 오히려 학부모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는지 그곳은 항상 대기자가 가득했다. 

학림은 토피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학을 더 중시하였고 (내 느낌), 외고반도 있었지만 과고반으로도 꽤나 유명했다. 이곳도 입원 자격시험은 있었지만 학원이 워낙 크다 보니 반을 계속 확장하면서 대부분의 학생을 받아주었다. 

마지막으로 세일 학원은 학부모/학생들 사이에서 별명이 ‘Sale 학원'이었다. 다른 두 학원에 비해 가격이 상당히 저렴했고 (반값 수준), 이는 가격 경쟁력으로 작용하여 학생 수로는 은행사거리에서 가장 많았다.


영어에 반감을 가지던 나는 토피아는 처음부터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떨어질까 봐 두려운 것도 한 몫했다). 세일도 뭔가 이름에서 정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학림 학원에서 입원 시험을 보기로 했다. 시험은 국어, 수학, 영어 3과목을 치르게 되었고, 담당 선생님은 서둘러 채점을 해서 결과를 알려주었다. 

“음... 가장 아랫반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면 되겠습니다.” 객관적으로 평가받은 실력의 현주소는 사교육 현장에서도 꼴찌였다. 

별로 충격적이진 않았다. 나는 그저 종합학원을 다닌다는 것에 살짝 설렘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소심한 이미지로 지내다 보니 심심했다. 그래서 학원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이미지 변신을 해보고 싶었다. 혼자만의 꿈을 가지고 학원을 등원했지만 내 기대감도 순식간에 바사삭 무너졌다. 학원은 학교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를 갔다 와서 그런지 좀비처럼 생기가 없었고, 쉬는 시간에는 대화하거나 놀지 않고 엎드려서 자거나 핸드폰 게임만 했다. 대부분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학원을 다닌다고 했고 학원을 그저 감옥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대형 학원을 다닌다고 해서 부러워만 했는데 막상 와보니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었다. 학원은 오후 5시 반부터 1교시가 시작했고, 5교시까지 마치고 저녁 10시쯤 집으로 귀가했다. 그렇게 매일 '학교 <->학원'의 삶이 반복되다 보니 점점 체력이 떨어졌고... 또 하나의 좀비가 추가되었다. 


어쨌든 공부를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목표를 세워보기로 했다. 학원에는 1학년 반이 약 20개 정도 있었다 (편의상 순서대로 1 등반부터 20 등반이라고 하겠다). 한 반에는 약 15~20명의 학생이 다녔으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다니고 있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1 등반부터 10 등반은 좋은 건물을 썼고, 11 등반부터 20 등반은 옛날 건물을 썼다. 그리고 모든 반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설국 열차’처럼 본인들의 위치를 매일매일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도 나름의 위계라는 것이 존재했다. 학원에서는 상위 반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배려해 주었다. 예를 들어 내신 준비 교제가 만들어지면 상위 반부터 순차적인 배포를 했고 특강의 경우에도 상위 반을 우선 배정해 주었다. 분위기부터 그렇다 보니 학원에서 상위 반 학생들을 지나가면 괜히 주눅 드는 느낌까지 받았다. 

학원에는 승격 및 강등제도가 있었다. 

3개월 간격으로 전 학생이 반 배치고사를 보았고, ‘성적 + 담임 선생님의 주관적 평가’에 따라 반에서 1~2등은 윗반으로 승격이 되었고, 반대로 밑에서 1~2등은 아랫반으로 강등되었다. 내 첫 목표는 ‘10 등반 내로 들어서 깨끗한 빌딩에서 공부를 해보자’였다. 사실 두 번째 목표도 있었다. 당시 학원에는 ‘학원 모델’로 활동할 정도로 아주 인기가 많은 여학생이 있었다.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어서 친해지고 싶었는데 현실적인 거리는 너무 멀었다. 그 친구는 1 등반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학교와 학원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만 했다. 공부를 하니 점점 실력이 쌓이고 성적도 계속 올라가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성장하는 것을 느끼고 결과를 보면서 재미가 붙었다. 학교에서도 내신 성적이 계속 올라서 1학년 말에는 전교 20등권으로 올라가게 되었고, 선생님들도 점차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챙겨주시기 시작했다. 학교 친구들도 종종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찾아오기도 했다. 동시에 학원에서도 3개월마다 쉬지 않고 월반을 했다.

‘20 등반 -> 19 등반 -> 16 등반 -> 10 등반’ 

공식적으로는 1~2개 반만 월반해 주는 것이 학원의 룰이었다. 학생이 반을 자주 바꾸는 것도 적응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갑자기 잘하는 반에 들어가면 슬럼프를 겪을 수도 있다는 배려였다. 그런데 매 반 배치고사를 봐도 성적이 계속 좋고 심지어 중학교에서 전교 20등권을 하는 학생이 고작 ‘16 등반’에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내 문제로 학원 선생님들 간 회의까지 열렸고 이례적으로 6개 반을 올려서 ‘10 등반’으로 배치해 주셨다. 

결국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에 새로운 빌딩으로 옮기는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오름세만 타보니 내 삶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예전처럼 쭈구리처럼 지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반장 선거에 도전하여 당선되기도 했다. 반장을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책임감을 가져보는 경험도 쌓았다. 그리고 친구들과 쉬는 시간마다 농구나 축구를 즐기면서 활동적으로 변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긍정적인 에너지는 공부를 할 때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한 번 높은 성적을 받고 나면 사람은 자연스레 ‘그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커진다. 이제부터는 억지로 동기를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내 마음속에는 ‘해야 된다’라는 끓어오르는 열정이 가득했다. 

점점 욕심이 생겨서 단숨에 1 등반으로 월반하는 전략을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모든 선생님들이 찬성할 수밖에 없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답은 하나였다. 

학원 전체 1등을 하면 되지 않을까?


반 배치고사에서 보는 과목은 3가지였다. 

1) 심화수학

2) 수학

3) 영어 

수학과 영어는 교과 과정 범위에서 출제가 되었고, 심화수학은 과학고를 보낼 인재들을 선발하겠다는 취지로 올림피아드 수준에서 문제를 출제했다. 보통 1 등반의 잘하는 친구도 심화수학 30점, 수학 90점, 영어 90점 정도의 수준으로 받아 총 210점을 유지하곤 했다 (10 등반 아래부터는 심화수학을 보지도 않는다). 당시의 나는 상대적으로 영어가 약하고 수학은 강한 편이었다. 영어에서 70점을 받더라도 심화수학에서 60점을 받으면 1등을 할 수 있다고 판단을 했다. 

이후, 나는 학교 수업 시간, 쉬는 시간 그리고 등하교 시간 길을 걸으면서도 올림피아드 문제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연구했다. 초반에는 올림피아드 문제 하나를 푸는 데에 10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하나의 문제를 수십 가지의 방법으로 풀고 또 풀고 몇 날  며칠간 계속 고민해보기도 했다. 정말 답이 안 나오면 학교 수학선생님을 찾아가서 질문하고 함께 며칠을 고민하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귀찮아하셨는데 계속 찾아가 보다 보니 어느새 선생님도 열정이 생기셨는지 점심시간마다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 함께 공부하곤 했었다. 

4개월간의 특훈(?)을 거친 후에 드디어 반 배치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심화수학을 열심히 공부한 덕인지 일반 수학은 너무나도 쉽게 느껴졌다. 물론 영어 공부는 잘 안 해서 점수가 잘 나오진 않았다. 며칠 뒤 최종 점수를 받았다. 심화수학 66점, 수학 100점, 영어 78점...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1등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선생님들은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했다. 채점이 잘 못 된 것 아닌지? 문제가 유출된 것 아닌지? 혹시 커닝한 것 아닌지? 그런데 커닝일 수가 없었던 게 심화수학은 모두 주관식이고 풀이까지 맞아야 정답이었다. 그리고 2등과 점수 격차가 큰 독보적 1등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담임 선생님과 수차례 상담 끝에 나는 1 등반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당시 부상으로 문화상품권 30만을 받았고 교재와 필기구를 사는 데 사용했다.)                


1 등반은 확실히 달랐다. 

일단 20명의 학생 중 여학생이 18명이었고 남학생은 2명이었다. 나와 나보다 더 조용하고 소심한 친구가 있었다. '그러면 내가 오기 전에는 너 혼자였다고...?' 

이 반에서 우리는 ‘남성’이라는 성별을 존중받지 못했다. 항상 칠판에서 가장 먼 끝 자리가 우리의 강제 지정석이 되었고 여학생들은 우리를 투명인간 취급을 하였다. 우리가 있던 없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했다. 안 그래도 여자와 말하는 것이 어려웠던 성격이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1년간을 지내다 보니 그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친구로 지내고 싶었던 ‘학원 모델’과는 결국 1년간 말 한마디 섞어보지도 못했다(ㅋㅋ). 

공부면에서도 1 등반 학생들은 수학은 아니지만 영어를 정말 잘했다. 듣기, 읽기, 쓰기…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들과 공부하면서 정말 큰 벽을 체감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찼고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중학교 2학년을 마쳤다.

학원은 대대적인 개편을 예고했다. 

이제 2학년 반을 ‘외고 준비반’, ‘과고 준비반’, ‘인문계 반’으로 학생들을 분류하겠다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내가 이과에 더 적성이 맞는다고 생각하셨는지 과고 준비반에 가라고 조언을 하셨다. 그런데 과고 준비반은 학원비도 1.5배 정도 더 비싸고… 개인 과외를 하면서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꼭 과고를 가야 할까? 아니 갈 수 있을까? 그냥 인문계에 들어가서 이과를 가는 게 어떨까? 여러 고민들을 해본 후에 선생님께 그냥 인문계 반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말이 인문계 반이지 그냥 하위권 반이니 과고를 안 가더라도 그냥 준비반에 가라고 했다.  

“음… 그러면 외고 준비반으로 가도 될까요?”


“뭐? 영어도 못하는 놈이 무슨 외고를 가겠다고”

팩트 폭력을 직방으로 맞으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외고 준비반을 가겠다고 결정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나름 1 등반이었는데 인문계반을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야망 없는 애’로 볼 것 같아서 그랬다.

2) 영어 잘하는 애들 속에서 외고를 준비하는 척하면서 1년간 죽어라 영어만 공부해서 약점을 보완하고 싶었다. 

그렇게 선생님에게 사정해서 나는 외고 준비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약점을 키우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나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을 자주 보곤 한다. 대학 입시나 취업 시 자기소개서에서 나오는 단골 질문 중 하나도 바로 '약점'에 관한 것이다. '본인의 장단점에 대해 서술하시오' 혹은 '단점이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사례에 대해 서술하시오'등과 같은 질문들… 말은 쉽지만 실제 삶에 적용해보고자 하면 막막한 느낌만 들었다. 강점과 약점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태어날 때부터 A라는 것을 잘하고, B라는 것을 못한다고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물론 위대한 스포츠 스타, 천재적인 예술가나 음악가들을 보면 부여받은 재능이 있는 것은 확실한 듯싶다. 

정규분포 양 끝단에 위치한 사례들은 제외하고 누구에게나 비슷한 재능과 한정된 시간이 주어진다. 그 시간을 어떻게 분배하고 어떤 능력을 성장시킬지는 본인의 선택이다. 하나의 능력에 모든 시간을 전부 투자할 수도 있고, 다양한 능력을 고루고루 균등하게 성장시킬 수도 있다. 이처럼 ‘시간의 비균등 분배’로 인해 자연스럽게 강점과 약점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일반적인 수준에서). 특히, 청소년기에는 시간 분배를 골고루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고착화된 강점과 약점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대한민국 교육과정에서 '문과'와 '이과'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에 의해 한쪽으로 선택하도록 강제되었다(물론 지금은 통합되었지만). 문과를 선택하면 자연스레 과학과 수학을 등한시해도 이해를 받게 되고, 이과를 선택하면 언어, 사회과학, 인문학적 소양 등을 신경 쓰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학생들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성장시키는 것이 '비교우위 관점'에서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통섭적인 사고를 가지기 어렵고 한 차원 이상의 성장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은 신의 한 수였지만 당시에 외고 준비반을 선택했을 때의 나의 상황은 꽤 암울했다. 외고반이 아닐 때에는 수학 점수가 꽤 높게 평가되었기에 '나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런데 외고 반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가장 높게 평가받았다. 시험은 주로 영어(듣기), 영어(독해), 영어(쓰기), 언어, 창의력 수학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심화 수학'에 특화된 나의 강점이 확 죽어버리게 된 것이다. 

늘 상위권만 하다가 중위권을 경험하게 되다 보니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장기적은 투자로 보고 온 것이니 단기적인 수모(?)는 견뎌보자.'


1년간 외고반의 스케줄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1) 매일 평일 오후 5시 반부터 저녁 10시까지 수업을 했고 새벽 1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

2) 하루에 고난도 단어를 100개씩 외우고 시험을 치렀고 틀린 개수대로 손바닥을 맞았다. 맞은 개수가 70개 이하면 토요일과 일요일에 학원을 등원해서 깜지를 쓰고 재시험을 봐야 했다 (지금 직장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은 왜 주말에 출근한 거지??).

3) 영어 독해와 듣기는 한 달에 1~2권씩 풀었고 숙제가 너무 많아서 학교 쉬는 시간마다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면서 숙제를 해야 했다. 


1년간의 '영어 지옥'을 버티고 견디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영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왕 준비를 시작한 김에...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도 시험을 치러보기고 했다.  

당시 유명한 외고(대원, 용인)를 지원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냥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외고로 지원을 했다. 그래도 한창 외고 진학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어서 경쟁률(4.7:1)도 꽤나 높은 편이었다. 시험은 지필 고사(영어 듣기)와 면접 고사(창의력 수학)로 이루어졌고 얼떨결에 최종 합격을 하게 됐다.

사람이 막상 붙으니깐 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렇게 외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번 도전을 계기로 앞으로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쉬운 쪽’보다는 ‘어려운 쪽’이나 ‘약점을 강화시키는 쪽’을 택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땐 몰랐다. 그때 개발해 둔 약점이 먼 훗날 강점이 될 줄은...




안녕하세요, 

이전 글에서 1/26일 오후 8시 20분에 유튜브 북토크 라이브를 공지했었는데요. 

당일 날 장소 문제 및 기술적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사전에 공지한 링크가 터져버렸습니다. 

혹여나 기다려주신 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당일 카페에서 진행하기로 하여 7시 30분에 대기를 시작했으나 유튜브에 카페 노래가 들어가면 저작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인지하여 급하게 주변 장소를 대여하여 8시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급하게 카메라를 세팅하고 영상 송출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링크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새로운 링크를 8시 19분에 만들어서 20분에 라이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급박하게 진행하다 보니ㅎㅎ 정신도 없고 시청자도 없고 횡설수설도 하게 된 것 같네요. 

이것의 라이브의 묘미...라고 생각하며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녹화본 링크를 남겨두겠습니다. 

(렌즈의 왜곡인지 코는 왜 크게 나왔을까?)

<북토크>

사실 우리는 불행하게 사는 것에 익숙하다

의사와 약사는 오늘도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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