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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共鳴)

2023.09.17

by 강준

2023년.

무더운 여름은 지나갔지만, 해가 쨍쨍한 날엔 여전히 땀이 흐르곤 했다.

8월과 9월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5년 넘게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 새로운 일터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비슷한 시기에 3번째, 4번째 책이 출간되어 북토크며 인터뷰며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지나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잡힌 어느 일요일의 약속.


이미 다른 일정이 있었던 터라, 만남의 시간은 2시간으로만 정해두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선을 그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여러 차례 틀의 박힌 소개팅으로 인해 기대감이 없었다.

새로운 사람에 대한 기대보다는 소중한 휴일이 무의미하게 낭비할까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다.


틀에 박힌 소개팅.

새로운 사람과의 형식적인 대화.

도파민 같은 감정에 속아 피상적인 연애를 하고 싶은 나이는 이미 지나 있었다.


일요일 오후 두 시.

달력은 9월을 가리켰지만, 햇볕은 여전히 여름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평소라면 꺼내 입지 않을 청바지를 그날은 이상하게 입고 싶었다.

나와 잘 어울리지도 않고, 입으면 불편하기만 한 옷이었는데도 말이다.


약속 장소인 카페는 사람들로 붐볐다.
‘자리를 미리 잡아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그 사람이 들어왔다.

"안..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짧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곳을 찾아 골목을 걷다, 구석진 2층 카페로 올라갔다.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손에 들린 책이었다.

아마 내가 작가라서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던 건, 그 책 표지 한쪽에 ‘○○○도서관’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책을 들고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건 책이 생활 속에 스며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깐... (물론 이것도 설정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 사람이 생각이 깊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이 금세 느껴졌다.

말을 고르는 방식이 섬세했고 사용하는 어휘의 폭이 넓었다.

그저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인데도 오랜 시간 책과 가까이 지내온 사람이란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호구조사나 신상을 묻기보다,
책 이야기를 하고, 삶의 가치관과 인생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대화가 이어지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 그 흔한 호구조사 한 번 없이 자리를 마무리했다.
다음 만남을 약속하지도 않은 채


"오늘 즐거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길로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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