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아침에 사표를 썼다. 다소 거창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물론 대기업에 다녔던 것은 아니다. 편의점 알바였다. 사장님은 나쁘지 않았다. 집이랑도 가까워서 출퇴근하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일한 지는 3개월이 넘었다. 문제는 어제저녁이었다.
새벽 3시 30분쯤 카운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술 취한 아저씨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자빠져 자고 있네. 씨." 혼자서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자빠져 자고 있네. 씨.' 순간 꼭지가 돌았다.
'아니. 지가 월급 주나.'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며 순간 잠이 확 깼다. '혹시 사장님 지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장 지인이건 말건 저딴 식으로 말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 취한 아저씨는 냉장고로 가서 참이슬 한 병을 꺼내 들고 다시 마른 멸치 한 봉지를 가지고 카운터로 왔다.
"디쁠 하나." 또 반말이다.
'하..'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추가로 디스 플러스 담배 한 갑을 꺼내 바코드에 찍었다. "삑."
"11,800원이요." 냉랭하게 말했다.
"겁나 비싸네. 씨." 아저씨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구시렁 거리며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만 원짜리 2장을 꺼내 던졌다.
'요즘 현금을 누가 가지고 다니나.' 만지고 싶지도 않았지만 멘털을 부여잡고 구겨진 돈을 정성스레 펴서 계산대에 집어넣었다.
"8,200원이요." 거스름돈을 건넸다.
"아가씨 됼디마. 요듬에 던 벌기가 을매나 어려운디 알아?" 아저씨가 풀린 눈을 하고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랐다. 아저씨가 가고 매대에서 말보로 레드 한 갑을 꺼내 바코드에 찍었다. "삑" 카드를 꺼내 5천 원을 결제했다. 연초는 오랜만이다. 그동안 전자담배만 피우며 버텨왔는데 연초 한 가치가 절실했다. 편의점 문밖으로 나와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빨간색 말보로 케이스다. 한때 이 케이스가 멋지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담배였는데 3년째 못 끊고 있다. 겉표지에는 구멍 뚫린 목구멍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사진이 박제되어 있고 그 옆에는 '이래도 계속 피우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박혀있다.
"재수 없게." 구시렁거리며 담뱃갑을 뒤집어 들고 손바닥에 툭툭 처댄다.
일명 '마사지'라는 기술이다. 이렇게 해줘야 연초 안에 있는 담뱃잎이 촘촘하게 응집되어 맛의 밀도가 올라간다. 부싯돌을 두어 번 켠 끝에 '지지 지직' 소리와 함께 불꽃이 연초 끝을 태운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반갑다. 첫 모금은 깊이 빨아들인다. 세포 사이사이로 니코틴이 퍼지는 기분이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랜만에 맛보는 날 것의 맛이다. 전자기기는 결코 줄 수 없는 아날로그 고유의 감성은 이기기 힘들다.
'입 냄새 오지겠네.'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지고 있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길가에 차를 대고 믹스 커피를 홀짝이던 택시 기사님이 힐끗 쳐다본다.
'여자는 길빵 하면 안 되냐. 언제까지 니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살아야 되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본다. 밤공기가 아직 차다. 그때 저기서 아까 그 술 취한 아저씨가 다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인다.
"아이, 씨." 손가락으로 담뱃불을 날려 끄고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아저씨가 풀린 눈을 하고 카운터로 다가온다.
"내 담배 어디 갔어."
"무슨 담배요?"
"무슨 담배? 아까 산 거! 디플! 어디 갔냐고."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아까 가지고 가셨잖아요."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없다고, 없어! 아까 못 받았다고 내 담배, 빨리 달라고!"
"뭔 소리예요. 아까 드렸어요. 가지고 가셨다고요. CCTV 확인해 드려요?"
"뭐? 얻다 대고 소리를 질러? 한번 해보자는 거야?" 술 취한 아저씨의 눈이 땡그랗게 변했다.
말없이 아저씨를 쳐다보며 카운터 밑에 있는 비상벨을 눌렀다. 경찰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버튼이다. 술 취한 아저씨와 의미 없는 기싸움을 하고 있는데 경찰이 왔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젊어 보이는 경찰관이 나지막하고 능숙한 말투로 아저씨를 어르고 달래며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피로가 몰려온다.
'하... 지친다, 진짜.' 그냥 빨리 사라져 줬으면 한다.
경찰이 아저씨를 데리고 가게에서 나가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언젠가 인터넷에 경찰을 비방하는 댓글을 달았던 기억이 떠오르자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더 이상 담배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너무 지쳤다. 빨리 집에 가서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자고 싶었다. 8시가 다 돼서 마감 청소를 하고 시제를 맞춰보고 있는데 사장님이 들어오셨다.
"별일 없었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데요." 무표정한 얼굴로 사장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언제?" 많이 놀라신 거 같았다.
"몇 시간 전에요.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요. 바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아무런 감정도 싣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이었지만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일하는 동안은 내가 할 만큼의 일은 충분히 했다. 난 알바였고 알바는 그런 존재였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쥐꼬리 월급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 얼른 가 봐. 병원이 어디시니?" 사장님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진도예요. 전남 진도." 아무 이유 없이 한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말했다.
"진도? 아이고 땅끝이네. 유주 어머니가 진도 분이셨구나." 약간의 의구심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취조할 수는 없었다. "그럼 오래 걸리겠네." 내 눈치를 보며 사장님이 말끝을 흐렸다.
"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집안에 복잡한 사정도 있어서요. 전화드릴게요. 사장님.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 우선 알바 하나 더 뽑으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동국이 오빠는 아직 일 못 구하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전에 일하던 동국 오빠와는 가끔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장어덮밥 장인이 되기 위해 이자카야에 취직을 하겠다며 호기롭게 나간 이후로 아직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집에서 일본 만화책 '초밥왕'을 2회째 정주행 하고 있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빨리 가보고, 도착해서 상황 보고 전화 줘."
사장님의 그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잠시 마음이 약해졌지만, 창밖, 얼마 전 새로 뽑은 사장님의 그랜저 세단을 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네. 안녕히 계세요."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무언가..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출근할 때 느꼈던 세상과는 어딘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집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길 건너 서울역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홀리듯 길을 건넜다. 뭘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아무런 의도도 갖지 않고 그저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겼더니 어느새 서울역 매표소 앞에 서 있었다.
"진도... 한 장이요." 말을 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도로 바로 가는 열차는 없고 목포까지만 가는 열차가 있어요." 창구 여직원이 말했다.
"그럼 목포 가는 열차로 주세요."
"몇 시 차로 드릴까요?"
"제일 빠른 거로 주세요."
'8시 40분, 서울-목포 ktx409.'
티켓을 받아 들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15분 뒤에 출발이다. 갈아입을 옷도, 속옷도 양말도 아무것도 없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그렇게 열차에 올랐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