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진도

어서 와, 진도는 처음이지?

by 이준

5 호칸 7D, 창가 자리다. 평일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열차 안은 한산하다. 몇몇 노란 머리 외국인 언니들도 보인다. 다행히 옆자리도 비어 있어서 편하게 갈 수 있을 거 같다. 창문에 처진 가리개를 위로 올려 젖혔다.

'뭐에 홀린 건가...' 어쩐지 어젯밤 그 술 취한 아저씨가 고맙게도 느껴진다. 만약 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도 난 집에 가서 맥주 한 캔 마시고 아무렇게나 양말을 벗어던져놓고 침대에 누워 수십 번도 더 돌려본 드라마를 보다가 풀벌레 소리 무한 반복 동영상을 틀어놓고 해질 무렵까지 자다가, 다시 편의점으로 출근했을 것이다. 큰 불만이 있는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소름 끼치게 행복한 인생도 아니었다.

바지 호주머니에서 에어팟을 꺼내 귀에 꽂고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을 재생시켰다. 위대한 음악가 쇼팽, 우리나라에서 가장 쇼팽의 음악을 잘 연주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피아니스트 조호진이다. 난 쇼팽과 조호진 씨의 영혼의 숨결이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다.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쇼팽의 녹턴은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듯 쓸어내리며 연주해야 그 곡이 가진 여리고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피아니스트 조호진이 그 감성을 잘 표현했다.

문득 또 다른 유명 피아니스트 한 사람이 얼마 전 자살 시도를 했다는 뉴스 기사가 떠올랐다. 남들이 보기에 남부러울 거 없는 인생을 사는 것만 같은 사람들조차 말 못 할 아픔 하나씩은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한편을 아리게 했다. 피아노 소리가 조금 더 애절하게 느껴졌다.

'아.. 근데 진도 가면 어디서 자지...' 상념이 지나간 자리에는 현실적 문제가 남아 있었다. 휴대폰으로 숙소를 검색해 볼까도 했지만 조금만 더 비현실적 세계에 머물러 있고 싶었기에 다시 눈을 감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온몸을 내리쬐며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집중하다 이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흐릿한 의식 속에서 사람들이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는 소리, 복도를 왔다 갔다 거니는 발걸음 소리, 열차 내 울리는 안내방송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깊은 잠을 잔 것은 아니었지만 평온한 오전이 주는 안정감이 온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더 이상 잠은 올 것 같지 않아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밖에는 초록 초록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이야 매일 보는 풍경에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겠지만 365일 빌딩 숲에 갇혀 사는 서울 사람에게는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감동이 있었다. 고된 신체적 노동을 요구하는 농사일을 보며 감동을 느끼는 것이 위선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노동의 숭고함이 주는 감동일 것이라 생각했다.

언젠가 시골에 사시던 외할머니가 서울 집에 놀러 와 시내 구경을 하며 감동받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빌딩도 아니면서 괜스레 어깨가 으슥해졌던 기억이 있는데 내가 모내기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 논 주인이 아닌 저 동네 사람들의 어깨도 으슥해질까.

다시 몇 달이 지나면 저 초록 초록한 벼들도 황금빛으로 물들겠지. 그리고 다시 베어지고 다시 심어지고.. 내 편의점 인생만이 우울한 쳇바퀴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세상 모든 일이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늙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완벽한 쳇바퀴 세상일 텐데. 눈가에 생기는 주름살, 쳐져가는 피부만은 쳇바퀴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이 더 예뻐." 언젠가 외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며 감탄해하던 내게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그저 할아버지가 할머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그 주름을 나와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고된 농사일을 돕고 사 남매를 키워내며 한 줄 한 줄 생겨난 그 주름살들이 할아버지에게는 함께 걸어온 인생의 아름다운 흔적들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건 단순히 어떤 외형적인 보편적 미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고귀한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불현듯 돌아가신 두 분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사스러워서, 남들이 볼까 봐, 뜨거운 눈시울을 마른 소매로 훔쳤다.

도착하기까지 아직 1시간이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이제 정말로 어느 정도의 계획을 세워야 할 것만 같았다. 휴대폰으로 진도 게스트 하우스를 검색해 봤다. 호텔은 너무 비쌌고 모텔은 혼자 가기에 뭔가 부담스러웠기에, 게스트하우스가 적당할 것 같았다. 다행히 두 군데가 검색됐는데 그중에 한적해 보이는 바닷가 해변 마을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가기로 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마지막 역인 목포역에 도착합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ktx 열차 안내방송이 나왔다.

열차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을 때 나는 멍하니 혼자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옷 하나 챙기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여행을 온 자신이 뭔가 굉장히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낭만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역 밖으로 나오자 소금기 어린 상쾌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이제 겨우 11시다. 천천히 가자.' 역 앞에서 갈치조림으로 점심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다이소로 갔다. 최소한의 물품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속옷이랑 양말, 티셔츠랑 반바지 몇 개, 물안경, 수영복 바지 하나, 칫솔, 스킨, 로션 등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백팩 하나까지 이것저것 최소한의 것들만 담았더니 52,500원이 나왔다. '역시 다이소가 짱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완벽한 하늘이었다. 짙푸른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돌연 슬퍼질 것만 같았다. 목포에서 버스를 타고 4개의 다리를 건너며 진도로 가는 길은 유럽의 어느 휴양지 못지않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저 멀리 갈매기떼와 태양에 반짝이는 바닷물이 '어서 와, 진도는 처음이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왠지 고향 집에 찾아온 것과 같은 정감이 느껴진다. '진도를 좋아하게 될 거 같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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