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tz again with you
버스정류장에 내려 곧장 해변으로 갔다. 게스트 하우스는 바닷가 바로 옆에 있었다. 오후 3시. 따뜻한 햇살에 바닷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적한 남해의 외딴 마을 평일 오후.
저 멀리 작은 부둣가에는 작은 오징어 잡이 배 2척이 정박되어 있었다. 그중 배 한 척 위에는 나이 든 어부가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 불현듯 조금 오래 앉아있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동네 슈퍼로 가서 청하 한 병을 사가지고 나왔다. 해변가 의자에 앉아 술잔도 없이 병째로 술을 홀짝이며 저 멀리 어부가 그물을 손질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예전에 어느 예능프로에서 유명한 코미디언이 예능의 끝은 다큐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몇 시간 동안 소가 여물을 뜯는 모습을 방영했는데 최고 시청률이 나왔다고.
요즘은 멍 때리기 시합도 한다. 모든 게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머릿속을 텅 빈 채로 놔둘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혹여 간헐적으로 그런 시간이 찾아오더라도 대개 그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유튜브영상이라도 재생시킨다. 그래서 생겨난 유행이 멍 때리기인데 그마저도 시합을 한다.
난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신춘문예에도 응모한 적이 있었는데, 몇 번을 시도하고도 당선이 되지 않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됐다. 가능성이 없어서라기보다 더 이상 쓸 주제도, 쓰고 싶은 이야기도 없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소설을 통해 나조차 납득할 수 없는 한낮 모래성 같은 사회적 메시지 따위를 이야기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냥 그렇게.. 단순한 일을 하고 싶었다. 복잡한 계산 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일. 그래서 시작한 것이다. 편의점 알바를. 그리고 오늘 아침에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근데 저 어부는 몇 년이나 저 일을 했을까. 엄청 고된 일일 텐데 어떤 힘이 저 사람을 계속 바다로 나가게 만들었을까. 분명 나가고 싶지 않은 날도 많았을 텐데. 이를테면 추운 겨울 새벽, 따뜻한 온돌방에 몸을 지지고 있노라면 온몸이 노곤노곤해져 문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을 텐데, 그런 날에도 주섬주섬 외투를 챙겨 입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다를 향해 묵묵히 배를 끌고 나가게 하는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떤 동력이 그를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일까.'
작년에 서울국제도서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인 작가의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책에 사인을 받고 작가와 사진을 찍는 시간이 있었는데 난 과감하게 사진촬영을 포기하고 작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작가님. 작가님이 첫 책을 출판하기까지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린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오랜 시간 동안 작가님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글을 쓰게 만든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강연 도중 미리 메모해 둔 질문지를 가지고 가 질문했다.
"음.. 굉장히 많이 받는 질문인데요... 저한테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강연 내용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이 됐던 질문이었기에 바로 추가로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사랑이라는 것이, 작가님께서 받은 사랑이.. 남다른. 이를테면 작가님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사랑을 받는 사람의 태도 문제일까요." 질문을 하면서도 갑자기 답변하기에는 어려운 질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절실한 문제였기에 어떤 답변이라도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작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 질문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음.... 저에게는 좀 다른 부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저희 언니는 저와 똑같은 사랑을 받았지만 저와는 많이 다르거든요. 혹시 글을 쓰시나요?"
"네." 글을 쓴다고 하기에는 출간한 작품도, 준비 중인 작품도 없었기에 다소 민망한 답변이었지만 그것이 꿈이었기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말고 계속 쓰세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세요." 내 뒤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탓에 눈치가 보여서 고개를 숙인 채 질문을 하고 있었는데 작가의 마지막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작가의 눈을 쳐다봤다.
그 순간, 작가의 눈빛과 몸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카리스마에 압도당했다. 초라한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거장의 아우라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작가가 어머니의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다는 말에는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그때 느꼈던 작가의 기운과 눈빛의 흔적은 내 가슴속에 남아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인받은 책에는 '호랑 해요.'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어느새 청하 한 병을 다 비웠다. 난 술을 천천히 마시는 편인데 맥주는 오래 놔두면 찌린내가 올라와서 두고두고 마셔도 향과 맛이 변하지 않는 종류의 술을 좋아한다.
머리가 알딸딸하고 시야가 흐릿해지며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다. 담배를 한 대 피울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벤치 앞에 두고 바짓단을 걷어올린 채 맨발로 백사장을 걷는다.
'따뜻하다.'
발바닥에 밟히는, '뽀드득' 모래알갱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백사장을 거닐며 내 발자국을, 내 발자취를 남긴다. 취기는 오르고 덩달아 기분도 달아오른다. 작게 멜로디를 흥얼거려 본다. 다만 그 멜로디는 알 수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선율이다. 특정 노래를 부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냥 지금 이 공간, 이 공기가 가져다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기분을 '이유주' 작곡의 즉흥곡으로 만들어 흥얼거리고 싶을 뿐이었다. 당장 내 귀에 꽃 한 송이 꽂아놓고 저 멀리 상공에서 드론으로 찍는 다면 어느 독립영화에 등장하는 미친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 미친년이다. 어쩔래.'
발걸음이 점점 더 가벼워진다.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타고 간다. 양팔을 들어 올려 보이지도 않는 누군가를 안아본다. 태어나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는 춤 동작이 나오는 것 같다. 이유주 작곡의 노래는 어느새 'cries and whispers'의 음률로 바뀌어있다. 외딴 마을 아무도 없는 넓은 백사장이 전부 '이유주'의 무대다. 그렇게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는 왈츠를 춘다.
노래는 점점 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눈은 감겨온다. 컴컴한 어둠 속 저 끝에 그리운 나의 아빠가 보인다... 아빠는 단단한 두 팔로 하늘 높이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위아래로 흔들거리며 빙글빙글 회전목마를 태운다. 자지러질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빠는 아이같이 해맑게 웃으며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래.. 왈츠를 춰 본 적이 있었다.'
'우리 딸 사랑해.' 기억할 수 조차 없던 아빠의 음성이 들려온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그 미소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빙산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모래사장에 주저앉아버렸다. 눈에서는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는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위로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이 바닷가 백사장에서.. 파도 소리만이 조용히 내 울음소리를 덮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