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진표

구조자

by 이준

한바탕 울고 나니 한결 속이 후련해졌다. 여전히 남아있는 취기 탓인지 제법 후덥지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바닷가 쪽으로 옮겨,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6월인데도 물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계속 발을 담그고 있다 보니 그마저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어 점점 더 깊은 바닷속으로 나아갔다.

물이 참 맑았다. 바닷물은 어느새 허리춤에까지 와 있었다. 바지가 흠뻑 젖었다. 어차피 빨래를 하려고 했던 옷이라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차가운 수온에 심장이 떨려오며 팔과 등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한두 걸음 더 나아가다가 이내 '풍덩'하고 바닷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뽀글뽀글 눈앞에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양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수영장에서는 느끼기 힘든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체온도 어느새 수온에 익숙해진 탓인지 춥지 않게 느껴졌다. 고개를 수면 위로 들어 올려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해안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큼지막한 암초가 여럿 있었고 그 주위로 해초와 산호초들이 가득했다. 물안경이 없었기에 선명한 시야 확보는 어려웠지만 물고기 떼가 보였다. 세부로 다이빙을 하러 갔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도 이 정도의 물고기 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따가 물안경을 가져와 다시 들어오기로 마음먹고 수면 위에 벌러덩 뒤로 돌아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마치 흰 도화지에 파란색 물감을 쏟아부어놓은 듯 구름 한 점 없이 짙푸른 하늘만이 가득했다. 두 눈만 물 밖으로 내놓고 몸이 가라앉지 않을 정도의 발장구만 치고 있었다. 누군가 만약 '자유'라는 단어를 몸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지금 이 행태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이고 이대로 있고 싶었다. 해안가와 너무 멀어질까 두렵기도 하고 해파리나 상어 같은 게 '덥석'하고 어디를 물지나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 모든 두려움보다 오랫동안 지금 이대로 떠있고 싶은 욕구가 더 컸기에 머리를 해안가 반대편으로 돌려놓고 점점 더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오래 떠 있어도 머리가 벽에 닿지 않을 만큼 넓은 이 바다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적어도.. 5분 만이라도 그러고 싶었다. 5분 후에 고개를 들어 해안선과의 거리를 가늠하고 다시 헤엄쳐 돌아간다고 해도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았다. 대한민국 바닷가에서 상어에 물려 죽었다는 기사는 본 적이 없다는.. 그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나를 다독이고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네..' 가만히 눈을 감아보았다.

그때였다. "철퍼덕, 철퍼덕." 어디선가 강한 물장구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던 찰나에 "촥!" 무언가가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끼약!"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이 뒤집혔다. 상어라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온몸이 공포에 휩싸이며 오직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나가려고 하는데, 낯선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요? 죽은 줄 알았어요!" 낯선 남자가 내 앞에서 입영을 하고 있었다.

순간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넋이 나가 있다가 오진이었다는 말을 들은 것과도 같은 깊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이내 깊은 분노의 감정으로 뒤바뀌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죄송해요, 저는 진짜 죽으러 들어가는 줄 알았어요."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것으로 보아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더 이상 대꾸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서 더 힘이 빠지면 이대로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해안가를 향해 헤엄쳐 돌아갔다. 남자도 뒤따라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죽을 뻔했잖아요."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감정을 부여잡고 남자에게 소심한 투정을 부렸다.

"미안해요. 저는 진짜로 기절한 줄 알았어요." 남자가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그제야 홀딱 젖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청바지 밑단에서는 '뚝뚝뚝' 바닷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 남자 정말, 앞도 뒤도 안재고 뛰어들어왔나 보네.'

"저기... 근데.. 여기 아직 수영금지예요. 해수욕장이 개장하려면 앞으로 한 달은 더 있어야 돼요. 그때까지는 수영하면 안 돼요..." 남자가 조심스럽게 변명하듯 말을 이어갔다.

'무슨 그딴 법이 다 있어, 내가 내 마음대로 수영도 못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 슈퍼! 맞죠?! 슈퍼 아저씨." 자세히 보니 아까 청하를 사러 갔던 슈퍼집 주인이었다.

"아.. 네.. 슈퍼에서 일하는 건 맞는데.. 아저씨는 아니고요. 저 23살이에요."

"어? 동갑이네요. 아니.. 그러니까.. 말이 슈퍼 아저씨라는 거죠. 미안해요, 말이 헛나왔어요." 멋쩍은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긴장이 풀리고 술기운이 가시면서 오들오들 몸이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감기 걸리겠어요. 우선 우리 슈퍼로 가죠. 담요 좀 덮어줄게요. 수돗가에서 모래도 좀 씻고요." 슈퍼집 남자가 다정하게 말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대꾸도 하지 않고 졸졸졸 남자 뒤를 쫓아갔다.

"미안해요."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괜찮아요. 제가 착각한 건데요 뭐.." 남자가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는 왜 들어간 거예요? 아직 물이 많이 차가운데요."

"그냥요.. 자유롭고 싶었어요."

"술 마시고 물에 들어가면 큰일 나요. 바다에서는 익명 사고도 많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남자가 진심으로 걱정하듯 말했다.

내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남자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 덮고 있어요."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게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고마워요." 두툼하고 큰 비치타월이었다. 타월을 덮자마자 기분 좋은 포근함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여기 이것도 마셔요." 남자가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이따가 계산해 드릴게요." 커피를 받아 들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까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저였어도 많이 놀랐을 거 같아요."

다정하고 세심한 남자의 태도에 내적 친밀감이라도 형성된 건지 뜬금없이 이름이 궁금해졌다. "이름이 뭐예요?"

"네?"

"이름이 뭐냐고요."

"아.. 진표예요. 김진표."

"저는 이유주라고 해요. 반가워요." 내가 진표를 보며 웃어 보였다.

"네 반가워요.." 진표도 나를 보며 웃었다.

"혼자 놀러 온 거예요? 아직 휴가철은 아닌데."

"네.. 퇴사하고 혼자 놀러 왔어요." 편의점 알바를 그만두고 퇴사라고 말하고 있는 자신에게 웃음이 나왔다.

"근데 뭐 공부하는 거예요? 아까 보니까 무슨 책 보고 있던데." 청하를 사러 왔을 때 남자가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있던 모습이 생각나서 물었다.

"아.. 공무원이요.. 해양경찰 시험 준비하고 있어서요."

"아.. 공시생이구나. 근데 왜 슈퍼를..." 순간 너무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할머니 하고 둘이 살아요. 원래 할머니가 가게를 보시는데 오늘 읍내에 가셔서 제가 보고 있던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근데 아까 23살이라고 했죠?"

"네."

"저도 23살인데 우리 친구 할래요? 04년생. 맞죠?"

"아.. 네."

"그럼 말 편하게 할까요?"

"그래요. 그럼."

내가 재밌다는 듯 웃어 보이자 진표도 따라 웃었다.


진표는 이 동네 토박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육지로 돈을 벌러 나가 진도에서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전주로 대학을 갔다가 아무래도 진도에 혼자 계시는 할머니가 걱정돼서 다시 진도로 내려와 할머니 일을 도우며 해양경찰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럼 언제 올라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컵라면 면발을 들어 올리며 진표가 물었다.

"원래 내일 올라가려고 했는데. 네가 동네 구경시켜 주면 하루 더 있을까 봐." 진표 할머니가 담근 김치를 입에 넣으며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

"와.. 예술이네.. 김치." 적당하게 잘 익은 배추김치가 라면 맛에 풍미를 더하며 입안 가득 침샘을 자극했다.

"어.. 가보고 싶은데 있어?" 진표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진짜 구경시켜 주게? 글쎄.. 멀리 가고 싶지는 않고 그냥 동네 구경?"

"그럼 내일 우리 왕자랑 동네 산책할래?"

"왕자?"

"우리 집 강아지. 완전 멋있어." 진표가 빙그레 웃는다.

"완전 좋지!" 평소 동물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매우 가슴 설레는 제안이었다.


어느덧 바다 끝 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와.. 진짜 개쩌네.." 입을 헤 벌리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본 지가 언젠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해는 항상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높은 빌딩에 가리고 세상에 치이느라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말없이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진표가 말했다. "지나온 시간이 아름다울수록 황혼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 이래. 오늘 하루가 좋았나 보다."

진표의 말을 듣고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24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일을 한 것 같았다.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어느덧 해는 점점 기울어 이제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이제 그만 숙소로 가봐야겠다." 평상에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옷은 여전히 축축했다.

"그래.. 숙소는 어디로 잡았어?" 진표가 데려다 주기라도 할 듯 나를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바로 옆이야. '마트리.. 카.. 리아' 게스트 하우스. 이름 참 어렵네."

"아..." 순간적으로 진표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왜?"

"아니야." 진표가 무심하게 말했다.

"뭔데?"

"아니.. 난 점잖고 좋으신 할아버지 같은데 우리 할머니가 별로 안 좋아하셔서." 진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아.. 거기 게스트 하우스가 우리 할머니 친구는 아닌데. 아무튼 비슷한 연배에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곳이거든. 별로 말도 없으시고 조용하신 분 같은데 우리 할머니는 별로 안 좋아하시더라고. 그냥 어른들끼리 뭐 그런 게 있나 봐." 진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 그래." 순간 두 분이 젊은 시절 썸을 탔던 사이는 아니신건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우리는 서로 sns 아이디가 아닌 휴대전화 번호를 교환하고, 내일 아침에 만나 왕자를 산책시키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게스트 하우스는 슈퍼에서 도보로 약 3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끼이이~" 나무로 된 울타리 문을 밀며 게스트 하우스 정원으로 들어서자 녹슨 경첩에서 소리가 났다.

날은 어둑어둑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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