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방명록

마트리카리아

by 이준

문을 열고 게스트 하우스 정원으로 들어서자 커다랗고 잘 가꾸어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정원 한쪽에서는 다소 왜소한 체구의 할아버지가 커다란 원예용 가위로 배롱나무의 가지를 치고 있었다. 아름답고 깔끔하게 정리된 정원은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들로 가득 차 있어 한눈에 봐도 주인이 심혈을 기울여 정성스럽게 가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원예에 심취해 내가 들어온지도 모르고 계신 것 같은 할아버지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토끼눈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나를 향해 걸어오며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야 기분 나쁘게. 사람이 인사를 하면 대꾸라도 해야지.' 노인의 손에는 원예용 가위까지 쥐어져 있어서 약간 기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가까이서 보니 체구는 작았지만 나이 든 노인치고는 굉장히 단단해 보이는 다부진 몸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예약한 이유주라고 해요." 다시 한번 한결 밝은 톤으로 노인에게 인사했다.

그래도 노인은 말없이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순간,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을 하고 하고 있는 나의 행색이 자각됐다. 머리는 바닷물에 떡이 져 산발이 되어 있고 옷은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축 늘어지고, 손에 양말이 든 신발을 들고 모래 묻은 맨발로 노인 앞에 마주하고 있으니 노인 입장에서는 정말 투숙객인지 아니면 새로 출현한 동네 미친년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게 아니라요. 제가 오늘 일찍 와서. 워낙에 물을 좋아하다 보니까 바다를 보자마자 그냥 달려들었지 뭐예요. 하하. 근데 물이 아직도 제법 차갑더라고요. 죄송해요. 여기 수돗가에서 발 좀 씻어도 될까요?" 최대한 정상인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보이기 위해 조금 전보다 한 층 더 밝은 톤으로 웃으며 말했다.

"진도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노인이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경계하는 눈빛이 아직도 나를 이상한 여자로 보는 것 같았다.

"네? 아.. 그냥 놀러 왔어요! 여기 동네가 너무 예쁜 거 같아요." 누군가에게 이상한 여자로 의심을 받는다는 건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이라 불편한 기분도 들었지만 혼자 사는 노인이라 겁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놀러 오셨다고요? 저희 집을요?" 노인은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손에는 여전히 원예용 가위가 쥐어져 있었다. 마치 여차하면 공격이라도 할 듯이.

"그럼 게스트하우스를 놀러 오지 뭐 하러 오겠어요. 사장님도 참. 급히 오느라 짐이 별로 없어요. 제가 옷이 다 젖어 있어서 좀 추운데 방부터 좀 안내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수돗가에서 호수로 발에 묻은 모래를 씻어내며 노인에게 말했다. 슬슬 사정을 설명하는 이 상황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이야기했다.

"아.. 그래요. 미안해요. 이유주 씨. 저도 순간 놀라가지고요. 어디서 오셨어요?" 노인이 먼저 앞장서서 방을 안내하며 내게 물었다.

"서울에서 왔어요. 어제 편의점 알바 때려치우고 스트레스받아서 퇴근하자마자 바로 그냥 기차 타고 진도로 쐈어요." 내가 철없는 손녀딸처럼 노인에게 말했다.

"아. 그래요. 근데 다른 곳도 많은데 왜 하필 진도를.. 여긴 서울에서 오려면 상당히 먼 거리인데요." 노인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요. 그걸 저도 모르겠어요. 뭐.. 일종의 운명적 이끌림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서울을 떠나야겠다 생각했는데 머리에 막상 떠오른 게 진도였어요. 아마 그냥 서울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나 봐요. 근데 아니나 다를까 와보니까 너무 좋은 거 있죠." 내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운명적.. 이끌림..." 노인이 내 말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곱씹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이런 몰골로 들어와서.. 방은 깨끗이 쓸게요. 혹시 세탁실이 따로 있을까요?" 노인 뒤를 따라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며 물었다.

"네. 여기 2층이 여자 4인실이고, 반대편이 남자 4인실. 그리고 1층에는 세탁실 하고 공용거실이 있어요. 주방도 있으니까 뭐 간단하게 해 드셔도 돼요. 이용시간은 아침 6시부터 저녁 11시까지에요. 아침에는 간단한 토스트 정도는 준비해 놓으니 원하시면 드셔도 돼요. 그리고 이번 주는 예약 손님이 없어서 이유주 씨 혼자 있으니까 4인실 전부 사용하셔도 돼요. 남자 손님도 없어요." 노인이 여자 방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와.. 진짜요. 그럼 저 내일 하루 더 연장해도 될까요? 아까 오면서 하루 더 연장하려고 했는데 인터넷에는 이미 내일 예약이 꽉 찬 거로 나오더라고요."

"하루 더요? 왜요?" 노인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네? 아니.. 낮에 여기 동네 구경하다 보니까 너무 좋아서 하루 더 쉬었다 가려고요. 여기 숙소도 마음에 들고요. 괜찮죠?" 내일 진표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물었다.

"음... 그래요. 그럼" 노인이 무심하게 말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게스트 하우스는 2층으로 된 숙소건물이 있었고 1층으로 된 창고가 딸린 별관이 있었는데 사장님은 별관에 따로 사시는 것 같았다.


방에 들어서자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두 개의 이 층침대가 있었는데 둘 다 좋은 목재로 만들어진 건지 좋은 냄새가 났다 이층 침대였지만 각 침실마다 칸막이가 쳐져있고 입구는 블라인드를 내려 가릴 수 있게 설계되어 있어서 공용공간이지만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게다가 난 이 넓은 방을 혼자 독차지하고 쓸 수 있었다.

'아무리 비수기라고 하지만 이 가격에 이 컨디션의 숙소에 예약손님이 한 명도 없다니. 완전 개꿀이네.' 4개의 침실 중에서 유일하게 창문이 달린 이 층침대를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가방을 올려두었다.

"드르르" 휴대폰 진동이 올렸다. 엄마의 문자였다.

'출근했니?'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가 내가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보낸 문자였다.

'그만뒀어. 아침에. 여행 왔어. 내일 모래 갈게.' 엄마는 내게 많은 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언제나 내가 뭘 한다고 하면 무한으로 지지해 주는 사람이었다. 17년 전 아빠가 사라진 후, '아빠 없이 자란 아이'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어디 가서도 기죽지 말고 크라고 무엇이든지 내가 하고 싶은 걸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던 엄마였다.

'그래.. 재밌게 놀다 와. 돈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역시나 엄마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괜히 더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기들은 이제 다 졸업준비를 하고 있을 시즌인데 나 혼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머리가 복잡해져 오기 시작했다.

'아.. 모르겠다.' 더 이상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고 뜨거운 물에 머리를 담갔다. 젖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느라 떨어져 있던 체온에 뜨거운 물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극락에 도달한듯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한동안 그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고 있었다. 욕실에는 샴푸, 린스, 바디워시, 드라이기 등등이 구비되어 있고 잘 개켜진 수건도 비치되어 있었다.


'어디 한번 올라가 볼까.' 샤워를 마치고 세탁을 하러 가기 전 잠시라도 창 밖 구경을 하기 위해 2층 침대 위로 올라가 보았다. 방에 불이 켜져 있어서 바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방의 전등을 껐다.

노인이 여전히 정원에서 원예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무리 작업 중인 것 같았다.

'역시. 세상 모든 것이 공짜가 없네. 저렇게 열심히 하시니까 이런 정원이 유지되는 거지.' 노인이 작업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이제 그만 블라인드를 내리려 하는데 갑자기 노인이 고개를 '휙'하고 돌리며 이쪽 창문을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아 머쓱한 생각에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지만 노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설마 내가 안 보이나.' 노인 옆에 가로등 불빛이 정원을 환하게 밝히고 있어서 아마 창문 안쪽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보이지도 않는데 여기는 왜 쳐다보는 거야. 기분 나쁘게.' 블라인드를 치고 방의 불을 밝혔다.


빨랫감을 가지고 1층으로 내려가 세탁기를 돌려놓고 거실로 갔다. 거실에는 작은 주방과 식탁이 있고 중앙에는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통창이 정원을 향해 나있었다. 한쪽 벽면에 있는 커다란 책장에는 오래된 책들이 잔뜩 꽂혀있고 중앙에는 책상이 있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난 주방에서 커피 한 잔을 타서 책장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이미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후르르' 한 모금 들이켜자 몸속에 따뜻한 카페인이 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카페인에 쩌들어 있는 몸이었기에 자기 전에 커피 한 잔 정도 마신다고 해서 수면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빨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심산이었다.

책장 한쪽에 작은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상당한 미모의 여자였다. 사장님의 손녀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사진 오른쪽 하단에 2008년 9월 2일이라고 날짜가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2008년도에 20대 중반이었으면.. 사장님 딸일 수도 있겠네.' 사진 속 여인은 바닷가를 배경으로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 채 아주 환한 미소를 띠며 웃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부족함도 없이 사랑만 받고 자란 온실 속 화초 같은 분위기의 여자처럼 보였다.

'부럽다.' 순간적인 시샘에 당황하며 액자를 내려놓았다.

책장에는 문학 책부터 시집, 과학책 등등 갖가지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오래된 책들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 프란츠 카프카, 헤르만 헤세 등등 물귀신 못지않은 책귀신이었던 나였기에 오래된 책들에 정신이 팔려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책장 맨 아래칸에 뜬금없이 양장으로 된 붉은색 공책이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오랫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건지 책 위에 먼지가 조금 쌓여있었고 겉표지에는 '마트리카리아 게스트하우스 방명록 2008년 3월 3일~'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오호..' 단숨에 작가지망생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서슴없이 공책의 첫 장을 펼쳤다.


'안녕하세요. 저희 마트리카리아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늘 여러분의 하루는 어땠나요.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주세요^^.'


글씨체나 문체로 봐서 노인이 적은 글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2008년이면 내가 5살 때다. 문득 그때의 사람들은 어떤 고민과 생각들을 갖고 살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2008년 3월 4일 25살의 어느 취준생 남자가 기록한 방명록을 시작으로 피부과 의사, 사회복지사, 요리사, mt 전 날 사전답사를 왔다는 대학생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방명록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청년들의 고민은 고만고만 비슷비슷해 보였다.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비장하고 때로는 귀여운 사연들을 읽어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목포에서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놀러 온 군인의 글도 있었다.

'저는 목포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해군 병장 이ㅇㅇ이라고 합니다. 전역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아 머리가 복잡했는데 여기 와서 편하게 쉬면서 앞으로 제대 후에 해나갈 일들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사장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제대하고 또 놀러 오겠습니다. 필승!' 방심하고 읽다가 '풉'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남자들이란.. 하긴 저 정도 미모면 휴가 나온 군인들 마음을 흔들만도 하지. 이 군인도 벌써 마흔은 다 됐겠네...'

"덜컥" 한참 재밌게 방명록을 읽어 가고 있는데 공용거실의 현관문이 열리며 사장님이 들어왔다.

"공용거실 이용시간은 11시까지에요." 시곗바늘이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 방명록을 책장에 꽂아두고 세탁실로 가서 빨랫감을 가지고 방으로 올라갔다.

'근데 게스트 하우스 초기에는 여자분 혼자 운영을 했나 보네. 사람들이 다 여자 사장님 이야기 밖에 안 하는 걸 보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으며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피로가 몰려왔다.

'그럼 게스트 하우스 이름도 그 여자분이 지었으려나.' 휴대폰으로 '마트리카리아'를 검색해 보았다. 마트리카리아는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들꽃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강인함', '인내' 그리고 '치유'의 꽃말을 가지고 있었다. 순간 오늘 사진 속에서 본 여자의 환한 미소가 넓은 들판에 피어있는 노랗고 해맑은 마트리카리아와 닮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스트하우스 객실예약 페이지에는 여전히 전 객실 예약완료로 표기되어 있었다.

'내일 사장님한테 말을 해줘야 하나..'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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