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노인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by 이준

"허어억!"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서 옷이 다 젖어있었다.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 한 없이 추락하는 꿈이었다.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서 한 동안 침대에 앉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성장기 중학생도 아니고 갑자기 왜 떨어지는 꿈을 꾸는 거야. 몸이 너무 고단했나 아니면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건가...' 휴대폰을 보니 벌써 오전 9시 27분이었다.

'언제 가?' 30분 전에 진표한테 문자가 와 있었다.

'20분 있다가. 슈퍼 앞으로 갈게.' 빠르게 답장을 보내고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노인은 벌써 나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공용거실 주방에 들러서 빵을 하나 집어 입에 구겨 넣고 진표네 슈퍼 앞으로 갔다.

진표가 평상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 네가 왕자구나!" 진표 옆에는 커다란 진돗개 한 마리가 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는데 나를 보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와서 '킁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하더니 이내 쪼그려 앉아 있는 내게 온몸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희한하네..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체통을 지켜야지. 왕자."

"원래 순수한 존재들이 진정한 미녀를 알아보는 법이지. 후후." 내가 그런 왕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데 진짜 잘생겼다. 개가 이렇게 잘생긴 거 처음 봐. 왜 왕자라고 지었는지 알 것 같은데." 실제로 왕자는 흡사 인격이 있는 존재처럼 시종일관 늠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개였지만 뭔가 의지가 되는 스타일이었다.

"이래 봐도 왕자는 뼈대 있는 집안의 혈통이야. 아무렴. 진도에서도 이 만한 인물 찾기 힘들지. 진도 하면 진돗개 아니겠어." 진표가 장난스레 으스대는 말투로 말했다.

"아.....!"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맞지.. 진도 하면 진돗개지...." 뭔가.. 흔한 말이었는데.. 대단히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억 저편에 뭔가 기억해내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왜 그래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정지되어 있는 내게 진표가 물었다.

"아니야... 진도 하면 진돗개라는 말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그거야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인데 뭘 그래. 새삼스럽게." 진표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오케이. 가자! 코스가 어디야?" 정신을 차리고 불쑥 일어서며 진표에게 말했다.


진표와 나는 왕자를 데리고 동네 해안가를 따라 산책했다. 이른 아침은 아니었지만 한적했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좋았다. 이런 게 시골에 사는 가장 큰 축복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커다랗게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들고 다시 동네로 돌아와 방파제 위에 앉아 멀뚱멀뚱 바다를 구경했다. 햇빛에 찰랑이는 바닷물이 아름다웠다.

"월! 월! 월!" 그때 갑자기 왕자가 해안선 끄트머리 항구 쪽을 향해 짖어대기 시작했다.

"가만있어! 왕자!"진표가 왕자를 진정시키고, 우리는 동시에 왕자가 짖어대는 곳을 향해 바라봤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그 끝에는 어제 그 어부가 어제와 같이 배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저 할아버지 어제부터 갑자기 배를 손 보고 계시네.." 진표가 왕자의 목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응? 누군데?" 어부의 모습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어? 누구긴 누구야. 너네 숙소 할아버지잖아." 진표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순간 흐릿하게 보이던 어부의 모습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루엣을 봐서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네.. 내가 책을 많이 봐서 눈이 별로 안 좋아.." 눈을 비비며 말했다.

"왕자는 거의 짖는 법이 없는데 이상하게 저 할아버지만 보면 짖어. 할머니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알아서 그러는 건지.. 가끔 민망하다니까." 진표가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데... 너희 할머니가 안 좋아하시는 뭐..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어젯밤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표에게 물었다.

"아.. 그건 뭐..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진표가 내 눈길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어?! 뭐야? 뭐 있구나?"

"아니.. 근데 이건 뭐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니고 전해 들은 얘기라 확실하지도 않고.." 진표가 계속해서 뜸을 들이며 말했다.

"뭔데. 야. 나 지금 거기 묵고 있잖아. 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지. 그리고, 난 이제 내일 가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외지 사람인데.. 나 입 무거워." 듣고 싶었다. 들어야만 할 것만 같았다.

"아.. 그럼 너.. 다른 사람한테 절대 이야기하면 안 된다.." 진표가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알겠다고. 내가 누구한테 말해." 진표를 달래며 말했다.

"아니.. 우리 할머니가 말해주신 건데.. 어렸을 때 저 할아버지는 읍내로 학교를 다니시고, 우리 할머니는 동네에서 다녀서 친한 사이는 아니라 잘은 모르셨는데... 어쨌든 예전에 저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 이 동네에서 돈 좀 있는 사람 집이었나 봐. 근데 그 사람이 자기 부인한테 허구한 날 주먹질을 해대서 부인이 집을 나간 거야... 그래서 그 집에 그 아저씨랑 아저씨 아들이랑 둘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집에 저 할아버지 어머니하고 저 할아버지 하고 둘이 들어와 살게 된 거야..."

"응..?" 언뜻 이해가 잘 안 됐다.

"저 할아버지 어머니는 원래 목포사람이었는데.. 저 할아버지 어머니도... 남편이 주먹질을 해대서, 이혼하고 아들만 데리고 진도로 온 거야.. 근데 어쩌다가 또 그 주먹질하는 부자 아저씨하고 재혼을 하게 되면서 그 집에 들어오게 된 거야... 인생 참...." 진표가 한 템포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사람 습관이 어디 가겠어? 그 부자아저씨가 저 할아버지 어머니하고 재혼을 하고도 또 주먹질을 해댔던 거야. 개 버릇 못주는 거지. 주먹질이 싫어서 이혼하고 진도까지 왔는데 또 주먹질인 거야... 하.. 근데 뭐 어떡하겠어. 재혼이었고 딸린 자식도 있고, 오갈 데도 없으니까 그냥 참고 사신거지.... 근데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 되나... 어느 날 그 부자아저씨가 어김없이 또..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는데..." 진표가 숨을 죽이며 말을 이었다. "그날따라 목이 마르다고.. 물을 마신다는 걸.. 그만.. 제초제를 마셔 버린 거야."

"하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그날로 바로 돌아가신 거야.. 그리고 그 아주머니가 얼떨결에 그 집 주인이 돼버린 거지.. 그 부자 아저씨도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도 없이 아들하고 둘이 살고 있었던 거거든... 어쨌든 졸지에 아줌마는 자기 앞으로 집이랑 논이 생긴 거야... 그리고 그 기세등등하던 부자아저씨 아들은 서자가 된 거고.." 진표가 깊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아줌마는 딱히 차별하지 않고 남겨진 애도 자기 아들처럼 키우려고 하셨는데... 부자 아저씨 장래를 치르고 얼마 안 가서.. 그 남겨진 아들이...." 진표가 뜸을 들였다.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다 또 죽은 거야... 연달아 두 명씩이나..." 진표가 멍한 눈빛으로 항구 쪽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그 아들 죽은 걸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저 할아버지였대.."

나도 진표와 함께 항구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진표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그럼.. 너희 할머니가 그 일 때문에 지금까지 쭉 싫어하셨다는 얘기야?"

"들어봐 봐.." 진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어찌어찌해서 저 할아버지 하고 어머니하고 둘이서 그 집에서 쭉 산 거야. 처음에는 남겨진 논도 있어서 그 아줌마가 어찌어찌 꾸려나갔는데 농사일이라는 게 여자 혼자 꾸려나가기도 힘들고 원래 목포에서 바닷일 하던 사람들이라서 쉽지 않았던 거지. 결국 저 할아버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디 선장 밑에서 일을 좀 배우다가.. 논을 팔아서 배를 한 척 사서 뱃일을 시작했데... 근데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육지 여자랑 선을 봐서 결혼을 했는데... 그때는 우리 할머니도 동네사람이고 하니까 참석을 하셨었나 봐... 하여튼 그렇게 잘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표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야말로 정말 폭력의 대물림 같은 건데.. 저 할아버지가 결국 자기 아버지처럼 자기 부인한테 손찌검을 하기 시작한 거야.. 아니 오히려 더했데. 당시에 임신까지 하고 있던 상태였는데도 그랬나 봐.. 그러니 여자가 견뎌 낼 수 있었겠어..? 여자가 애를 낳고 얼마 안 가서 도망가 버린 거야.... 결국 자기 어머니하고 딸하고 셋이 남게 된 거지.."

순간 어제 공용거실에서 보았던 여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진표의 말대로라면 그 여자가 저 할아버지의 딸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분명 아주 밝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폭력적인 아버지 손에서 자랐다는 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의 오만과 편견이었던 건지.. 아니면 그 후로 노인이 변한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니.... 근데.. 그 여자분.. 엄청 밝고 예쁜 얼굴이던데.. 그냥... 사랑만 받고 자란.. 그런 사람 같았어.. 근데 그런 아픔이 있었다는 게..."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그 여자를 어떻게 알아?" 진표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제.. 봤어... 게스트 하우스 1층에서."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자 옛날에 죽었는데...."

"죽었다고?"

"어! 할머니가 옛날에 죽었다 그랬는데.. 네가 어떻게 봤다는 거야..?" 진표 눈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아니.. 사진으로 봤다고. 1층 공용거실에 그 사람 사진이 있더라고."

"아, 깜짝이야! 난 무슨 귀신이라도 본 줄 알고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그 사람 맞는 거 같은데... 엄청 미인이지..? 맞지?" 어제 본 사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나는 너무 어릴 때라 잘 모르겠는데 할머니가 미인이었다고 했어."

"근데... 왜..? 어쩌다가 돌아가신 거야?"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아.. 이거는... 너 괜히 불안해할까 봐 굳이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진표가 또 뜸을 들이고 있었다.

"야.. 나 지금 거기서 자고 있다고..."

"하... 알겠어... 그러니까 그 이후로는 별 탈 없이 셋이 잘 살았다고 들었어.. 어쨌든 할아버지가 배를 타면서 두 사람을 다 케어했으니까. 그런데 그 여자분이.. 20대 중반쯤 됐을 땐가..? 원래 그 집에, 옛날에 농사지을 때 소를 키웠던 작은 축사가 있었는데.. 그 여자분이 그 축사를 허물고 2층짜리 건물을 한 채 지어서 게스트 하우스를 만든 거야.. 셋이 살기에 부지가 좀 크기도 했고.. 그 할아버지가 워낙에 자기 딸을 어디 못 나가게.. 옆에 끼고도니까, 딸이 그나마 아빠하고 떨어지지 않으면서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지... 근데 그거 차리고 얼마 안 가서 사달이 난 거야..." 진표가 잠시 침묵했다.

"무슨.. 일..?"

"너 진짜로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안 된다..." 진표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 알겠다고.."

"그러니까...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다가 그 여자분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서울 어디에서 온 손님하고 눈이 맞았나 봐...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애를 밴 거야...." 진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임신을 했다고..?"

"어... 근데 그걸 자기 아빠가.. 그러니까 저 할아버지가 알아버린 거지... 그다음은 안 봐도 알겠지..?" 진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남자는 떠나서 연락도 없지.. 아버지는 애를 지우라고 난리지... 결국 그 여자분이....."

"여자분이 뭐...?"

"목을 맺대....."

"하아...."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기구한 운명이지..." 진표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딸이 그렇게 되고.. 게스트 하우스는 거의 1년 가까이 방치되고 있었는데.. 저 할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바닷일을 완전히 그만두시고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계시는 거야... 나도 다 할머니한테 간간이 들은 얘기라 아주 정확하지는 않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픈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던데.. 저 할아버지의 인생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어떻게 저렇게 기구한 삶이 있을까.. 괜히 물어봤나,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저 할아버지가.. 어제부터 갑자기 배를 손질하고 계시는 거야.. 거의 15년도 넘게 한 번도 안 만지고 방치만 해뒀었는데... 저 연세에 다시 고기를 잡을 리도 없고..." 노인은 여전히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배 손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여자분이 불쌍하기는 한데.. 저 사장님도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진짜 기구한 인생이다..."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좀 안 됐다고도 생각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저분 주위에 계속 안 좋은 일만 벌어진다고.. 가까이하지 말래.. 내가 걱정돼서 하시는 말씀이시겠지.." 그렇게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야. 수영이나 하러 가자. 어디 괜찮은데 있어?" 머리를 식히고 지속된 긴장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있지. 따라와." 진표가 씩 웃어 보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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