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구나... 이제 와서..
2008년 7월 4일 무더운 여름.. 아들 생일에 맞춰서 놀러 온 가족들.. 사업에 실패하고 머리를 식히러 온 낚시꾼 아저씨.. 지난주 파혼하고 홀로 여행 온 아가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마치 옴니버스 영화 한 편이라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니까 새로운 소설들이 계속 나오지..' 어쩌면 이 방명록에서 내 졸업작품의 포문을 열어줄 영감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쭉 읽어 내려가던 중.....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커피 한잔하러 거실로 내려왔는데 반가운 노트가 보이길래 몇 자 남깁니다.. 이번에는 진도의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와 우리나라 국견 진돗개의 늠름한 모습을 렌즈에 담아 가려고 합니다. 혹시 사장님께서 추천해 주실 만한 아름다운 명소나 진도에서도 유명한 진돗개 친구가 있을까요?'
2008년 9월 1일
순간...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굳어졌다. 사진작가의 필체.. 내 육아일기에서 수 천 번도 넘게 보았던 아빠의 필체와 똑같았다. 아빠의 필체는 이 세상에서 내가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필체였다. 아빠 특유의 'ㅇ'과 'ㄴ'자가 있었는데 필체의 방향과 끝맺음이 아빠의 그것과 똑같았다.
'그럼.. 아빠가.. 여기로 사진을 찍으러 왔었다는 건가...' 아빠의 흔적을 집이 아닌 외부에서 발견한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르헨티나 어느 마을 도서관에서 엄마를 마주친 것과 같은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잠깐만.. 2008년이면 내가 몇 살이지..' 머리가 굳어있어 얼른 계산이 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몇 번을 반복해서 접은 끝에 겨우 내가 5살 때라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5살 때 아빠가 이곳에 왔었다... 아빠가 사라지기 1년 전인데..'
엄마한테 듣기로 아빠는 항상 지방으로 사진 촬영을 하러 다녔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자신의 직업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내 마음속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이 강력하게 불길한 기운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서둘러 다음 장을.. 그다음 장을.. 그리고 또 다음 장을 넘겨봤지만.. 아빠의 글은 없었다.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사진.....!'
방명록을 '툭' 하니 그대로 책상 위에 내려놓고 서둘러 책장 쪽으로 가서 여자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집어 들었다.
'2008년 9월 2일' 사진 오른쪽 하단에.. 마치 나에게 증명이라도 하듯, 선명하게.. 날짜가 찍혀 있었다.
'다음 날이다...! 아빠가 방명록을 남기고 간 바로 그 다음 날이야. 이 사진... 우리 아빠가 찍어준 거야...' 몸이 굳고 동공이 확장되며 입이 벌어졌다. 머릿속이 혼돈의 카오스 속으로 접어들고 왠지 모를 공포감까지 엄습해 오던 그때,
'덜컥'
공용 거실 현관문이 열렸다.
"뭘 그렇게 놀래요." 노인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태연하고 싶었다. 태연하려고 노력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아직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이게 무슨 일인지.. 이 퍼즐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뒤죽박죽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지금 당장은.. 저 노인 앞에서 태연하게.. 놀라지 않은 척.. 태연하게 행동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난 연기자가 아니었고 연극배우가 아니었다. 무력감이 느껴졌다. 노인에게 능청스러운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떡 벌어진 내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고 확장된 동공은 쉽게 움츠러들지 않았다. 노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허어... 네.. 그..."
"제 딸이에요.." 노인이 찻장에서 찻잔을 꺼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난 노인의 몸동작을 통해 지금 내 모습이 내가 상상하는 정도까지의 아연실색한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말 그렇다면 노인이 저렇게 태연할 수는 없었다. 노인은 찻잔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커피포트에 뜨거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네요.. 딸아이가 죽은 지.." 뜻밖이었다. 노인이 직접 딸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어.. 디.. 보자..." 노인이 허리를 숙여 아일랜드식 식탁 아래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티백 2개를 꺼내 찻잔에 나눠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거실 책상으로 가져왔다.
"이리 와서 따뜻한 차 한잔해요. 기분이 훨씬 편안해지실 거예요."
"아... 네..."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2개의 찻잔을 사이에 두고 노인과 마주 앉았다.
"한잔해요. 몸에 좋은 허브티예요." 노인이 '후 우우'하고 입김을 불고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아.. 네.. 감사해요." 찻잔을 들어 올린 손이 미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어요.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고 제게 남겨진 유일한 혈육이었죠..." 노인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딱딱하기만 했던 노인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상황조차 혼란스러웠다.
"네..." 부인이 죽게 된 경위가 진표의 말과 달랐다. 진표는 분명 나에게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했었다.
"저는 원래 뱃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여기 게스트 하우스는 딸아이가 차린 거고요. 다 큰 딸이.. 아빠랑 헤어지기 싫다고.. 집에 있던 축사를 개조해서 게스트 하우스를 만든 거지요. 정말 한없이 밝고 착한 아이였어요. 저랑은 많이 달랐죠. 예쁘고... 어딜 가나 사랑받았어요.." 노인이 딸 얘기를 하면서 옛 기억이 나는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보여요.. 사진 속 따님이 정말 이쁘고 밝아 보이세요.." 용기 내어 노인에게 말했다.
"그렇죠... 근데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 있어요.. 우리 딸은 사실.. 어릴 때부터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어요.. 아마 자기 엄마가 그렇게 된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자기가 태어난 게 잘못됐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 마음을 숨기려고 더 밝게 보이려고 애썼지만.. 그게 병을 더 악화시킨 건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우울증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죠..." 노인이 '후루룩'하고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런 딸아이가.. 지 딴 애는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게스트 하우스를 오픈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는데...." 노인이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서울에서.. 어떤 남자 손님이 온 거예요.. 여기에...." 그러면서 내 얼굴을 쓰윽 쳐다봤다.
순간 온몸이 굳으면서 움푹 들어간 등줄기 사이로 굵은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 내려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근데.. 그놈이.. 우리 딸아이를 유혹한 거죠. 뭔 사진작가라고 했다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냥 동네 제비같이 보였어요.. 근데 그놈이 우리 딸아이를 유혹하고는 서울로 줄행랑을 치고.. 연락을 끊어버린 거예요.. 참나... 세상에... 근데요.. 그 남자가 말이에요.. 알고 봤더니 유부남이었던 거예요..." 편안하게 이야기를 시작한 노인의 눈이 광기 어린 눈빛으로 변했다가 이내 다시 허탈하다는 듯 이죽 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하아.. 딸아이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정말 많이 힘들어했죠... 그러다가.. 그러다가 세상을 떠난 거예요... 이미 오래된 얘기예요..." 노인이 다시 '후루룩'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주체할 수 없이 떨려오는 손발을 자제시키려고 허벅지를 강하게.. 피멍이 들 정도로 강하게 꼬집었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여기서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됐다.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아빠가... 우리 아빠가 그 여자를 죽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그러면 우리 아빠는..? 그리고... 이 노인은 내가 그 사람 딸이라는 걸 모른다는 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지... 분명히 난 알바를 그만두고 그저 내 의지로... 내 선택으로... 여길 놀러 온 것뿐인데...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분명히.. 나는.. 내가 선택해서 여기 놀러 왔어... 그저 일을 그만두고 놀러 온 것뿐이야... 근데 그게 어떻게 여기 일 수 있냐고... 이 노인이 나를 불렀다고..? 그건 말도 안 돼. 난 분명 내 발로 여길 찾아왔어... 왜 진도를 온 거지... 잠깐만 그럼 우리 아빠는... 우리 아빠는 어떻게 된 거지?'
"그럼... 그 남자... 그 유부남은 다시 안 찾아왔나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런 놈이었으면 그러지도 않았겠죠.."
"아니 근데 임신을......"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노인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임신.. 이요..?" 노인의 눈빛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러니까.. 임신을 안 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그게...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더 이상..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죽을죄를 지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한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 아빠가 저지른 짓이었다.
'만약 이 노인이 내가 그 사람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래.. 그렇다고 설마 나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야... 벌써 20년도 다 되어가는 얘기잖아... 근데... 그럼.. 우리 아빠는.. 아빠는 어떻게 된 거지.. 그 여자를 따라 죽기라도 했다는 거야...?'
"내가 처음 보는 아가씨한테 별소리를 다하네요... 후 우우... 잔 비워요.. 가지고 나가게." 노인이 찻잔을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아.. 제가 치울게요."
"얼른 비워요. 방으로 가져가려고 그래요."
"아.. 네.." 바들바들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바쳐 잡고 찻잔에 남아있는 식은 차를 한 입에 비워버렸다.
노인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가볍게 미소 짓더니 찻잔을 가지고 문밖으로 나갔다. "그럼 푹 쉬다 가세요."
극한의 긴장감이 가시면서 다리가 풀려오고.. 머리가 '지끈지끈' '빙글빙글' 지독한 두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거실 통창으로 노인이 별채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다시 방명록을 집어 들었다.
'2009년.... 2009년....' 숨을 헐떡거리며 방명록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미안하구나. 이제 와서.. 금방 갈게. 못난 아빠를 용서해 다오. 2009년 10월 2일.'
'아빠는 여기에 왔었다...!!'
2009년 10월 2일... 아빠가 사라진 날이다. 아빠는 그때 엄마에게 여수에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진도에 온 것이었다.
'노인이 거짓말을 했어...!! 왜... 왜.. 다시 온 거야.. 그때는 이미 그 여자도 죽고 없었을 텐데... 1년이 지나고.. 굳이 왜.. 그 여자도 없는 이곳에 와서... 여기 이 방명록에.. 나한테 금방 간다는 글까지 남기고... 그리고 왜 돌아오지 않은 거야.... 왜 나를 속인 거야......'
머리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지고 시야가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팔 하나.. 다리 하나.. 손가락 하나 꿈틀거릴 힘도 없이.. 비몽사몽.. 꿈을 꾸는 느낌마저 들었다.
'몸이.. 왜 이러지..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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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안개가 걷히고 아빠가 보였다... 그리고 아빠 앞에는 아주 작은... 여자아이가 아빠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아빠! 또 어디 가? 유주 놔두고.. 또 어디 가?"
"응... 아빠 금방 다녀올게. 사진만 찍고 우리 유주 보러 금방 올 거야." 아빠의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어디? 어디 가는 건데?"
"....." 아빠가 대답은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디 가는 건데? 유주한테는 말해주기로 했잖아.."
"..... 진.. 도.. 아빠.. 진도 갔다가 금방 올 거야."
"진도?? 거기가 어딘데?"
"진도는.. 우리나라 제일 끝에... 끝에 있는 섬이에요. 유주 진돗개 알지? 월월 우리나라 국견 진돗개."
"웅. 진돗개. 할머니 집에 바둑이 진돗개."
"맞아요.. 우리 유주 똑똑해. 진돗개 고향이 진도예요. 거기 가서 아빠가 사진 많이 찍어올게요."
"우와... 그럼 진돗개도 데려오는 거야? 유주 동생 데려오는 거야?"
아빠 안색이 어두워지며 말이 없어졌다.
"아빠! 빨리 와야 돼. 알겠지?" 그런 아빠를 내가 꼭 안아준다.
"알겠어. 아빠 금방 올게." 아빠도 나를 꼭 껴안는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꼭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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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빠는 진도에 간다고 했었다.....' 엄마가 나에게 여수라고 세뇌시키는 바람에 내 기억은 흐릿해졌었지만 아빠는 분명 나에게 진도에 간다고 했었다.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