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살인의 추억

바다가 우는 이유

by 이준

누군가 머리를 야구 방망이로 두들겨 팬 것처럼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커다랗고 빨간 고무 다라이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라이 안에 구겨진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을 때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에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다시 몸에 힘을 줘 일어서 보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발목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 으으..."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은 커다란 솜뭉치에 막혀 재갈이 물려 있었고 양손은 뭔가에 꽁꽁 묶여있었다.

'케이블.. 타이...?'

어깨선부터는 몸이 바깥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에 밖을 볼 수 있었는데 전등 빛이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창고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바늘... 갈고리.. 그물.. 망치.. 톱... 갖가지 공구들이 벽에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 커다란 셔터 문이 닫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왼쪽 구석에서 노인이 뒤돌아선 채 무슨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온몸에 나 있는 모든 털이 쭈뼛쭈뼛 곤두서며 뇌혈관의 신경들이 찌릿찌릿 스파크가 터지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인이 나를 감금시켰다...!'

도망을 가야 했다. 감금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에 힘을 주고 다라이를 움직여 보려고 하는데 "끄... 윽..." 또다시 발목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작업을 하던 노인이 뒤를 돌아봤다.


"애쓰지 마.. 너 발목.. 내가 작살냈어... 다시는 못 걸을 거야.. 어차피 걸을 일도 없겠지만...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어.. 지 애비 닮아서 약빨이 잘 안 받네.. 독한 새끼들.." 노인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노인의 손에는 커다란 칼이 쥐어져 있었다. 돌아서서 무딘 칼날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당신 뭐냐고...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 제발...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작은 비명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냥..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그래.. 일어난 김에.. 얘기 좀 해보자.. 너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던 거냐..? 뭘 보고 눈치챈 거야..? 분명히.. 분명히 처음엔 몰랐어... 맞지? 그걸 아는 년이 물놀이를 하다가 온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네 얼굴이.. 분명.. 아무것도 모른다고 쓰여 있었단 말이야... 근데 도대체.. 내 딸사진에서 뭘 본거야..? 뭘 보고 눈깔이 그렇게 커져가지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던 거야..?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그 사진에.. 뭐가 있던 거야? 분명히.. 뭔가 알아버린 얼굴이었어..." 노인이 시퍼런 칼날이 서 있는 칼을 들고 성큼성큼.. 광기 어린 얼굴을 하고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으.. 으으.." 도망을 치려고 온몸을 비틀며 발버둥을 쳐보려고 했지만 또다시 발목에서 엄청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마... 시간 많아.. 설마..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흐흐흐.. 농담하지 마.. 널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휴대폰... 휴대폰...' 다라이 통 안에 잔뜩 구겨진 채로 호주머니 이쪽저쪽을 더듬어가며 휴대폰을 찾아보려고 했다.

"휴대폰..? 야 너 내가 씨발.. 바보로 보이냐.. 이미 다 빼놨지.. 포기해.. 이 동네로 지금 이 시간에 널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까..." 노인은 내가 절망하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처음.. 예약 명단을 봤을 때... 깜짝 놀랐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동명이인 일거라고 생각했지.. 근데... 나이가 먹으면 이 뭔가... 기운 같은 게 잘 느껴진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네가 여기를 알고 찾아올 일은 없다고.. 그냥.. 내가 나이를 먹어서.. 겁을 먹어서.. 헛된 망상을 하는 것이라고 되뇌면서도.. 도무지 말이 안 되잖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고.. 그것도 혼자서 말이야.. 진짜 나를 잡으러 오는 거면 너 혼자 오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네가 혼자 여기 와서 뭘 할 수 있겠냐고.. 그런데도.. 그런데도 말이야... 이상하게.. 그..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겠는 거야... 그래서 혹시... 혹시 모를.. 뭔가를 위해서.. 내 나름대로도 어떤 준비를 해놔야 하지 않겠나.. 싶더라고..." 노인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안 오다가 7시가 다 돼서야 들어온 거야... 난 네 얼굴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봤지. 모를 수가 있겠어..? 네 애비하고 똑같이 생겼는데.. 내가 어떻게 네 아빠 얼굴을 잊을 수가 있겠냐? 내 손으로 직접 죽인새낀데..."

'우리... 아빠를... 죽였다고...!' 순간 몸이 석고상처럼 굳고 시야가 확장됐다.

"뭐야...? 설마... 진짜 모르고 있던 거야..? 어? 이 씨발 대답해 봐. 너 어디까지 알고 있던 거냐고!!" 노인이 빠르게 내게 다가와 왼손으로 내 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엄청난 아귀힘에 치아가 다 뽑혀 나갈 것만 같았다.

"분명히... 분명히 뭔가 눈치챈 얼굴이었다고... 안 그러면 내 딸이 임신했었던걸 네 년이 어떻게 알았냐고!" 노인이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불에 타오르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한 동안 내 눈을 쳐다보더니 이내 손에 힘을 풀고 얼굴을 놔줬다. 치아가 부러진 것처럼 얼얼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긴 뭐.. 이제 와서.. 뭐가 됐던.. 어차피 상관없어... 네 년은 어차피 죽여버리는 게 맞아.. 그게 화근을 잘라버리는 거야. 그러려고 이번 주 내내 예약도 막아놓은 거니까. 니 무덤 네가 판 거지.. 진짜 좆될 뻔한 거야... 이제 공소시효도 없어졌는데 씨발.. 지금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올 텐데... 그럼 우리 엄마는 어떡하냐고..."


온몸이 비현실적으로 떨려오기 시작했다. 무조건.. 무조건 살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삶의 끝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아빠를 죽인 새끼한테.. 나까지 살해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케이블 타이에 묶인 손목 사이로 스마트 워치가 만져졌다. 노인이 시계는 건들지 않은 것 같았다. 서둘러 시계의 버튼을 눌러보았다. 운명의 장난처럼 배터리가 1퍼센트 남아있었다. 마음이 조급해 오기 시작했지만 노인이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시계를 조작할 수는 없었다.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슬쩍슬쩍 고개를 숙여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고무 다라이가 어깨까지 가리고 있어서 손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나 휴대폰은 꺼져 있어서 전화나 일반문자를 보낼 수는 없었지만 같은 기종의 휴대폰이라면 전용메시지는 보낼 수 있었다. 언제 방전될지 모르는 스마트워치로 통화목록에서 가장 위에 있는 번호로 저장된 텍스트를 전송시켰다. '안녕.'이라는 문구가 전송된 것 같았다.

'아이.. 씨..' 무언가 하나 더 보내려고 했을 때 시계가 방전되고 말았다.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아빠는 개쓰레기새끼였어.. 법이 심판할 수 없는 네 아빠를 내가 심판한 거라고..." 노인이 뭔가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딸아이 유품을 정리하는 데.. 휴대폰에서 네 아빠랑 문자 한 게 있더라고.. 하아... 우리 딸이 임신했다고 했더니.. 네 아빠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어? 알아..? 돈을 줄 테니까.. 지우라고 하더라고.. 하... 개새끼야.. 너네 아빠는 개새끼라고.. 내가 그때 얼마나 큰 모욕감을 느꼈는 줄 알아? 그때 결심했어.. 이 개새끼를 내 손으로 죽여버려야겠다고.. 어렸을 때.. 그 짐승만도 못한 두 새끼를 죽이고 다시는 사람 죽일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어.." 노인의 눈에서 다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아빠가.. 우리 아빠가.. 설마....'


"그런데... 그런데 씨발 어떻게 죽여야 할까.. 엄청 머리가 아프더라고.. 서울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새끼 집에 찾아가서 죽일 수도 없고... 그때.. 아주 좋은 생각이 났어.. 내가 찾아갈 수 없다면 이 새끼를 이쪽으로 부르면 되는 거지.. 그럼 훨씬 일이 수월하거든.. 이 동네는 내가 훤하니까..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 줄 알아? 흐흐흐..." 노인이 갑자기 소름 끼치게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딸이 죽고도 8개월을 참았어.. 8개월을.. 그러고 나서 네 아빠한테 전화를 건 거야.. '나 소영이 애비되는 사람이요..' 흐흐흐.. 네 아빠가 전화기를 붙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느껴지더라고.. 내 딸이 2달 전에 당신 애를 낳고 지금 혼자서 외도에 들어가 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내려와서 내 딸 얼굴이라도 보고.. 당신 아들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고.. 안 그러면.. 언론에 이 사실을 다 뿌릴 거라고.. 흐흐흐... 내 딸이 예정대로 애를 낳았으면 그때가 정확히 2달이 되는 날이었거든.. 아주 치밀하게 준비를 한 거지..." 노인이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그래.. 그래도 네 아빠가 그때는 잘 나갔잖아.. 그렇지? 딸한테는.. 절대 연락하지 말고 혼자 오라고 했지.. 지도 저지른 죄가 있으니까 주위에 아무한테도 말 못 했겠지.. 그리고 1주일도 안 돼서 내려온 거야.. 이 새끼가.. 흐흐흐.. 거실에 앉혀놓고 차를 한 잔 먹이면서 내 배로 외도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좋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중간쯤 가다가 수면제 먹고 곯아떨어진 네 아빠를 바다로 던져버린 거야.. 흐흐흐..."


'그럼.. 방명록에 쓴 글이.. 나한테 쓴 글이 아니었다는 건가...'


"너네 아빠 장례식장에도 갔었어... 그 뒤로 매일 인터넷으로 너네 아빠 이름을 검색해 봤거든.. 어느 날 부고기사가 뜨더라고.. 궁금했어.. 수사가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뭐 실수 한 건 없는지.. 남아있는 가족들 질질 짜는 모습도 보고 싶었고.. 흐흐흐.. 그때 알았어.. 니 이름도.. 씨발 근데 엊그제 예약 명단에 니 이름이 있는 거야. 설마설마했어... 너무 신기하지 않아? 이런 운명의 장난이라는 게..?" 노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죽을 년한테 쓸데없이 너무 많은 얘기를 했네...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지는 게 문제야.." 노인이 벽에 걸려있던 도축용 앞치마를 허리에 두루기 시작했다.

"근데... 네 아빠 바다에 던지고 나서... 새벽에 배를 끌고 나가면.. 그렇게.. 귓가에 네 아빠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야 씨발.. 그래서 뱃일을 그만둔 거라고.. 이제 네 아빠한테 보내줘야지.. 아빠 외롭지 않게.. 흐흐.. 흐.."


그때였다.


"유주야.."


진표가 밖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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