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에서
노인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입을 벌린 채 나를 쳐다봤다.
"뭐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누구야.. 이 시간에... 누가 널 찾아왔다는 거야...?"
"유주야..." 밖에서는 진표가 계속해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긴장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떠냐.. 이 개새끼야.. 너도 이제 끝났어.'
노인은 손발이 떨리는 듯 내 입에 채워진 재갈을 다시 한번 꽁꽁 졸라맨 후 앞치마를 풀어놓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월! 월! 월!"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인 것 같았다.
밖에서 진표와 노인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명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제발... 제발...'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에.. 이 땅에.. 모든 만물에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제발.. 진표가.. 진표가 들어오게 해주세요...'
지나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초등학교 때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고 용돈을 받아냈던 일, 수업시간에 선생님한테 거짓말하고 양호실에 누워 있던 일.. 살면서 저지른 과오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착하게 산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죽을 만큼.. 이렇게 죽을 만큼 엄청나게 큰 죄를 짓고 살지는 않았잖아.. 그렇지만.... 지금까지 무고하게 희생당한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들도 큰 죄를 지어서 죽은 건 아니잖아.. 뭐야 그럼..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뭐가 다르다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거야.. 세상은 사필귀정 이라며.. 그럼.. 아빠는...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이렇게 죽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덜컥' 창고 문이 열렸다.
'제.. 발.....'
노인이었다.
노인이 다시 차분한 몸동작으로 문을 닫고 걸쇠를 걸어 잠갔다. "철컥"
그러더니 느닷없이 책상에서 칼을 집어 들고 미친 사람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질끈' 두 눈이 감겼다.
"이거냐?!" 다급하게 뛰어온 노인이 강하게 내 손목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 개 같은 년이.." 노인이 주먹으로 내 얼굴을 강하게 내리쳤다. 비명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왼쪽 눈이 함몰된 듯 제대로 뜰 수 조차 없었다.
"하여튼 대단해... 정말 대단한 새끼들이야.. 애비나.. 새끼나..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남자를 만나 가지고.. 문자를 보내?" 노인이 내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워치를 잡아 뜯으며 말했다.
"하마터면 진짜 좆 될 뻔했잖아.. 하아... 진짜로... 흐흐흐... 와... 역시 모든 게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거야..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 노인이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커다란 망치로 스마트 워치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뒤질 년한테.. 쓸데없이 너무 많은 소리를 지껄이다가.. 시간만 낭비했어.." 노인이 다시 도축용 앞치마를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는 안 올 거야.. 아직 안 들어왔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널 찾으러 어디 부둣가라도 갔을 거다. 이 새벽에 '안녕'이라고 보냈다며.. 차라리 잘 됐어.. 나중에 경찰에서도 네가 아빠 따라 자살한 것처럼 생각할 거야.. 마무리는 내가 알아서 잘할 거니깐..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어.. 시간을..." 노인이 코앞에까지 다가왔다.
"너를 왜 다라이 안에 넣었는지 알아..? 사람 피 무게가.. 엄청나거든..."
노인이 칼을 치켜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심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나도 모르게 두 눈이 감겼다.
'이제 끝이구나....'
"으악!"
그때 갑자기 노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눈을 떠보니 바닥에 노인이 쓰러져 있고 그 위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노인의 목을 물고 있었다.
"왕자! 안돼!" 밖에서 진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게 닫힌 셔터문이 버겁게 열리며 진표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진표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입을 떡 벌린 채 온몸이 석고상처럼 굳은 듯했으나 이내 쏜살같이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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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눈을 떴을 때 병상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으.. 으으..."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데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이 욱신거렸다.
"유주야! 유주야! 괜찮아?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유주야..?"
"어... 김진표.. 그만해... 괜찮으니까.."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움직이지 마.. 발에 깁스되어 있어." 진표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머리에는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고 발에는 석고 깁스가 감겨 있었다. 얼굴에서도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발목이 부러지고 안와골절이 됐는데.. 다행히 ct 상으로 뇌손상이나 다른 더 큰 부상은 없는 것으로 보인대.. 의사 선생님이.. 극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은 거라고..."
진표의 설명을 들으니 어쩐지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곧 오실 거야."
"뭐..? 엄마한테 전화했어?"
"그럼,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전화를 안 드려. 병원하고 경찰에서도 계속 보호자를 찾는데.."
"하아..." 이 몰골로 엄마를 볼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진표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마지막에 네가 창고로 들어오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어."
"네가 전용메시지 보낸 거 아니었어? 아니 갑자기 새벽 1시가 넘어서 '안녕'이라는 메시지가 오는 거야. 그것도 생전 안 쓰는 전용 메시지로.."
"내가 보낸 거 맞아."
"그래, 그래서 바로 너한테 무슨 일이냐고 답장했는데 답도 없지. 전화했는데 휴대폰은 꺼져있지. 뭔가 일이 생겼구나 싶더라고. 바로 왕자를 데리고 게스트하우스로 가봤지. 근데 그렇다고 여자 방에 함부로 들어가 볼 수 있어? 창밖에서 최대한 조용히 네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 창고에서 그 할아버지가 나오는 거야."
노인이 창고 문을 열고 나갔던 장면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냐고 하길래. 너한테 온 문자를 보여주면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와봤다고.. 혹시 방에 있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막.. 내가 널 어떻게 아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그러더니 아직 안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이거 뭔가 큰일이 났구나 싶어서. 경찰에 신고하고 동네 좀 수색해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왕자가 그 집 정문 앞에서 안 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거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난리를 치더라고.. 목줄을 끌어당기는데.. 막 점프를 하고 발버둥을 치고.. 나도 모르게 힘에 겨워서 줄을 놓쳤는데.. 얘가 거기 창고 셔터 문 밑에 작은 틈새로 몸을 막 구겨 넣으면서 쏜살같이 기어 들어가는 거야. 내가 너무 놀래가지고 '왕자야! 안돼!' 하면서 부리나케 쫓아 들어갔지 그랬더니..." 열을 올리며 설명하던 진표가 그만 말을 뚝 끊었다.
"경찰에는 네가 신고한 거야?"
"어.. 지금 병실 밖에 형사분들 계셔.. 모셔올까..?"
"아니.. 조금만 있다가.." 온몸이 쑤셔왔다.
"고마워... 너 때문에 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진표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말하자면 길어..."
한 동안 멍하니 누워 있다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허어...."
엄마가 오고.. 경찰 조사를 받고..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나의 이야기는 각종 미디어를 휩쓸었다. 뉴스, 시사 프로그램, SNS까지 모두가 내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걔 중에는 근거도 없는 살까지 붙여가며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각색해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아빠는 근 20년 만에 다시 유명인사가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보자는 제안까지 해왔다. 그렇게 이 나라를 떠나야 되나 하는 생각까지 들 무렵 언제나 그렇듯이 나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이슈에 묻혀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6개월이 지났을 무렵에는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학교에 복학했고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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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안녕하세요. 지안출판사 마케팅부 이지영 팀장입니다. 다름 아니라 저번에 말했던 서울 국제도서전 북토크 행사에.. 작가님 북토크가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아서 안내 차 연락드렸어요." 내 책을 출판한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제.. 제가요..?" 대한민국에 수많은 훌륭하신 작가님들을 제치고 내가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네.. 아무래도 작년에 작가님 책이 이슈가 됐던 게.. 많이 반영이 된 것 같아요.."
"아.. 이슈요..."
처음으로 독자들을 단체로 만나는 자리였다. 북토크가 시작되기 전 신경안정제를 두 알이나 먹었는데도 무대에 서자 후들후들 다리가 떨려왔다. 내 나이 26살에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자리였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2시간을 채울 수 있을까 멘탈이 나갈뻔했는데 사회는 역시 아무나 보는 게 아니었다. 노련한 사회자의 경이로운 수준의 진행 덕분에 그럴듯하게.. 아무 사고 없이 북토크를 마칠 수 있었다.
북토크가 끝나고 이어서 사인회와 사진촬영 시간이 이어졌다. 3년 전 편의점 알바를 하며 진상을 치우던 내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출판하고 북토크를 진행하고 사인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감개가 무량했다. 감사한 마음에 사인과 사진촬영쯤이야 몇 번이고 해 드릴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로 인해 점점 기계처럼 웃고.. 말하고.. 사인하고 있는 나 자신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툭'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 깜짝..."
진표였다.
"아이 씨.. 깜짝 놀랐잖아.."
"미안해요.. 죽은 줄 알았어요."
"허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인회를 마무리하고 진표와 함께 근처 카페로 갔다.
"오랜만이다."
"이제 유명하신 분이 돼서.. 연락을 할 수가 있어야지.."
"까분다..."
"대단해... 이유주."
"대단은.. 무슨... 경찰 합격한 거 축하해.. 너 합격하면 축하주 마시기로 한 거.. 오늘 어때? 한 잔 해야지."
"그래서 내가 왔잖아." 진표가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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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렵다며..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래놓고 한 방에 이런 대작을 쓰기 있어?"
"대작은 무슨.. 그런 소리 하지 마."
"갑자기 무슨 영감이 떠오른 거야? 진짜 재밌게 봤어. 네 작품."
"... 그냥... 그 사건 있고 나서.. 뭔가 머릿속이 정리된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 머릿속으로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명확하게 구분 지으며 살려고 했던 것들의 벽이.. 허물어진 느낌이랄까.. 오히려 그러니까 더 자유로워지더라고. 그냥.. 이래 쓰나 저래 쓰나 잃을 것도 없겠다 싶더라고.. 어차피 사필귀정도 모르겠고.. 인과응보도 모르겠고.. 정답도 없는 것 같은데.. 이래 쓰나 저래 쓰나 똑같이 망할 것 같은데.. 그냥 내 마음대로 막 써보자. 내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로 써보자. 그랬더니 술술 써지더라고.. 근데 그게..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아니.. 출판이 된다는 것조차 상상도 못 했지.. 진표야.. 사람 일.. 진짜 모른다..."
"아니..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 한 방에 되는 게 말이 되냐. 네가 그동안 쌓아왔던 게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 인생에 공짜가 어딨냐."
잠시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세상에... 또 다른 이유주가 나오지 않길 바랐어..."
"응..?"
"그동안.. 너무 자책만 하고 살았거든... 모든 게 내 책임이다.. 모든 책임을.. 나한테만 지으려고 했던 것 같아.. 근데 세상이.. 세상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깨끗하지는 않은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나 정도면..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 정도면..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잘 살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니까.. 너무 억울한 거야.. 세상에 훨씬 나쁜 짓 저지르고도 더 뻔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노인 딸도 그런 식으로 자책하며 자살한 거고.. 그래서.. 그래서 세상에.. 나 같은. 또 그 여자분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면 해서. 그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당신 정도면 잘 살고 있는 거니까..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힘들어도 꿋꿋하게 버티고 살아가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 사람마다 그걸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나한테는.. 나한테는 그게 글이었던 것 같아..."
"아.."
"글로 쓰나.. 그림을 그리나.. 노래를 부르나.. 아니면 너처럼 그렇게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돕거나. 우리 모두 결국 하나의 지점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여자분도.. 그런 마음으로 처음 게스트 하우스를 차렸던 게 아닐까..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마음 편히 내려놓고 쉬었다 가라고... 마트리카리아처럼... 그래서... 그래서 내 글도.. 감히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어 줄 수 있을까 싶어서..."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런 나의 어깨를 진표가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 지금까지 '마트리카리아'를 사랑해 주신 구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허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첫 작품이라서 서툴고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원래 3화까지는 힐링 소설로 쓰려고 집필한 작품이어서 서스펜스 장르로 이어지는 부분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는 관심과 애정을 받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더 좋은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