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by 이준

몰입을 좋아하는 편이다.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정말 그런 편이다. 누군가 가장 행복한 순간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사람들의 스쳐 지나가는 계절과도 같은 시선도 무시한 채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에 대해 깊이 빠져 고민하고 사색하고 열정적으로 나의 에너지를, 무해하게 뿜어낼 수 있는 그 순간을 나는 너무 사랑한다. 외골수라고 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작은 키에 크지 않은 체격의 어린아이가 나 홀로 텅 빈 놀이터에 쭈그리고 앉아 부러진 나무 막대기를 모래밭 위에 휘적거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혼자 중얼중얼 하다가 남몰래 히죽거리기도 한다. 재밌는 상상을 하고 있나 보다. 그게 그 어린아이에게는 남모를 행복이었다. 어린 시절 부끄럽게만 느껴지던 그 순간이 나이가 들고 나를 알아가고 나의 내면과 더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아련하지만 고요한 평온함을 주는 그런 행복감으로 다가오곤 한다.

누구나 비가 오는 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커다란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투명 우산을 쓰고 걸어간다. 신발은 젖지 않는 등산화면 더 좋다. 그렇게 큰 비는 아니어도 괜찮다. 추적추적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그 반복되는 소리가 내 귀의 달팽이관을 달랠 수 있을 정도면 괜찮다. 나의 귀에는 처벅처벅 나의 발자국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린다. 투명 우산 너머에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마저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 큰 고민도 없지만, 그리 큰 우울감도, 걱정도 없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안락한 평온함이 나를 소소한 행복감에 젖어들게 한다. 그 행복감은 너무 미미해서, 마치 젖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온몸이 흠뻑 젖어버린 것을 뒤늦게 깨닫게 해주는 가랑비처럼 그렇게 살금살금 나도 모르게 다가온다.

행복이 익숙해질 즈음, 그것이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닐 만큼 자연스러워질 때 즈음에 숲길 끝에 자리 잡은 목조로 지은, 금방이라도 굴뚝에서 허연 연기라도 피어오를 것만 같은 카페가 나타난다. 난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며 능숙하게 나무계단 위로 오른다. 딱딱한 등산화 굽이 나무계단을 디디며 둔탁한 나무통 소리를 낸다. 계단 끝까지 올라 커다란 대문의 손잡이를 잡고 힘껏 열어젖힌다. 그 커다란 나무 대문의 육중한 무게감이 좋다. 평일 오전에 찾아온 뜻밖에 손님의 인기척에 한동안 이어지던 카페의 정적이 깨진다. 머쓱하지만 태연하게 카운터로 다가가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을 주문한다. 카페 중앙에는 적당한 크기의 책장들이 즐비해있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책 한 권을 꺼내든다. 어느 여작가가 쓴 에세이 책이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바리스타의 목소리가 몽상을 깬다. 나는 신줏단지 같은 책 한 권과 유자차 한 잔을 가지고 카페 구석진 자리로 향한다. 바 테이블 위에 책과 찻잔을 내려둔다. 두툼한 외투를 벗어 튼튼한 나무의자 위에 걸쳐두고 자리에 앉는다. 테이블 바로 앞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통유리창 앞에는 커다란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그리고 그 대나무 사이사이에는 생명의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집어 들어 그 향긋한 유자향이 내 후각을 충분히 적실 때 즈음에 후루룩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켜본다.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며 온몸이 노곤노곤 해진다. 이제 찻잔을 잠시 내려놓고 책을 집어 든다. 손끝에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이 좋다. 너무 부드럽지도 거칠지도 않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각사각 종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책 속으로, 문자 속으로, 작가의 정신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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