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말했다.
운명이란 어쩌면
서로가 준비되었을 때
비로소 만나는 사람을
인연이라 부르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지금에서야 내가 너를 알아본 건
운명이었을까.
왜 나는
이제야 우리를 알아보게 된 걸까.
과거도 아니고,
미래가 아닌
지금에서야.
서로를 알아본다고 해서
곧바로 관계가 시작되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때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엔 그랬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그 사람의 서사를
제대로 받아들이기까지.
그 시간 동안
나는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그 사람을 이해하는 쪽에 머물렀다.
군대를 기다려 본 적도
유학을 기다려 본 적도 없던 내가
어떤 확신 속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럼에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 사람은
내가 살아오며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사랑의 형태들을
나에게 건네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말했다.
그 이전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니라고.
내 세계는
너를 만나기 전과
만난 이후로 나뉜다고.
그 전의 사랑은
언제나 나를 지키는 선 안에서 이루어졌다.
아무리 깊어 보여도
내가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엔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그 사람의 일이
어느 순간부터
내 일처럼 느껴졌고
그 경계를
따로 구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나라는 경계가
조용히 이동한 상태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사랑은
소유도 아니고
희생도 아니었다.
다만
나와 너를 나누던 선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순간.
그래서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