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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by namtip



강풍주의보가 내린 날. 넓고 잘생긴 잎들은 바람을 타고 모두 떨어졌는데 위쪽에 쪼그라들어 말라비틀어진 나뭇잎들은 어떻게든 가지에 붙어있었다. 곤충이 탈피한 껍데기처럼 누렇고 형태가 기이했다. 바람이 이렇게 세게 불걸 알고도 기어이 걸을 작정이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되돌아왔는데 못생긴 잎들은 아직 그대로였다.


다음날 바람은 잔잔해졌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펴고 볼일을 보고 돌아오면 진정 가지만 남겠다 했다. 그날은 늦게 들어와 미쳐 볼품없는 이파리쯤은 다 잊고 잠에 들었는데 꿈에서 그 잎들이 나를 둘러쌌다.


잎들이 말하기를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걸 천천히 깊이 다 들이마셨더랬다. 그리고는 보기 좋은 잘생긴 잎이 되어 바람이 불 때 멀리 날아가고도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이 허리를 구부려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살펴주겠다 싶었더랬다. 그래서 한 번 더 바람 부는 날이 오면 그러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실컷 물을 마셨는데도 곱아지고 구멍 난 잎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불현듯 처음이 떠올랐다. 봄에 딱딱한 껍질을 뚫고 움텄을 때 눈이 부셔 오히려 더 움츠러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밖으로 봉긋 나와서도 한참을 기다렸다. 피지도 않은 자기를 보며 근사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쯤엔 살가운 공기가 간지럽혀 결국은 마음껏 꽃 피우고 열매도 맺었다. 그때가 떠올랐댔다. 그런데 어제 내가 물끄러미 자기들을 보는 눈빛은 봄의 그것이 아니었다. 환희도 탄성도 아니었다.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나 나는 밖으로 나가 큰 장대로 나뭇잎을 탈탈 털어주었다. 그리고 구석에 봉긋하게 모아 성냥불을 붙였다. 물을 먹어 배부른 잎들은 처음엔 차마 타지도 못하고 그저 검은 연기만 내뿜었다. 열심히 손부채를 부쳐 불길을 내고 그제야 활활 불꽃을 내민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음껏 타올랐다.



아! 내 입에선 봄의 탄성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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