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반에 시작한 경기가 8시쯤 되니 7회 초로 달려가고 있다. 만년 꼴찌라는 한화가 처음부터 선전을 했다. 맞은편 한화응원단은 SSG홈그라운드의 응원을 꺾을 기세로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이제는 양 팀 관중 모두가 기립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경기장의 열기는 최고조로 이를 때쯤 나는 문학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배터리가 8%뿐이다. 빨간불이 들어온 핸드폰으로 택시를 불렀는데 택시 아저씨와 약속 장소가 엇갈렸는지 택시콜을 취소해 달라는 통화를 마지막으로 전화기가 꺼졌다.
내 앞으로 수많은 택시가 지나가는데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잡히질 않는다. 망했다. 아까 전화기가 꺼지기 전이 9시 15분쯤이었으니까 15분 안에 도착해야 북클럽을 시작할 수 있는데.
경기장 너머로 계속해서 환호성이 들리는데 내 마음은 점점 초초해져만 간다. 고개를 쭉 내밀어 멀리까지 내다보니 왼편에 맥도널드가 보였다. 가게 불빛 아래에 서있으면 눈에 잘 띌까 해서 뜀박질을 했다. 가게 앞 가로등 아래서 열심히 손을 흔든 지 좀 됐을 때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핸드폰이 꺼지니 택시도 잡을 수가 없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목적지를 말하기도 전에 고맙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지나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도 열심히 손을 흔들길래 브레이크 밟았어요, 야구 보러 오셨나 봐?"
"네, 가족들하고 다 같이 야구 보러 왔는데 저는 북클럽을 해야 해서 먼저 나왔어요."
아직까지 가쁜 숨을 들이쉬며 말하는 나에게 아저씨는 친절히 충전기를 건네셨고, 나는 바로 단체톡에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가는 중이라고.
"당연한 건 없어요."
"네?"
"아가씨가(아이들과 야구장에 왔다고 했는데도 계속 아가씨라고 불러주셔서 참 좋았다.) 가족들과 야구장에 가는 것도 지금 무슨 공부하러 가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니에요. 이런 일상이 있는 게 좋은 거예요."
"아~네... 그런데 제가 일정을 너무 한꺼번에 잡았나 봐요. 욕심냈어요"
"빨리 달려야겠네, 이런 게 다 행복이에요. 욕심낼 수 있는 거"
오늘 아이들과의 약속 때문에 야구장도 가야 하는데, 저녁에는 북클럽도 있는 날이다. 북클럽 멤버들에게 야구 보느라 시간이 안될 것 같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 없는데 늦게라도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결국 야구도 중간에 보다 나오고, 북클럽도 내 예상보다 늦게 생겼다.
택시 잡으려고 길에 서 있는 내내 욕심부린 나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일상이 좋은 거라니. 욕심낼 수 있는 게 행복이라니. 아저씨의 말에 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났다.
난 항상 혼자 내 할 일을 하고, 알아서 희로애락을 처리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려면 삶까지 공유하게 된다. 그렇기에 처음에 북클럽을 모집할 때 고민했던 게 바로 이 지점이다. 감정을 공유하는 게 서툰 사람인데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삶의 일부를 공개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욕심을 부려 스케줄에서 빼고 싶지 않을 만큼 마음이 커졌다. 내 어설픈 모습도 그게 나라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런 나를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그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현자 같은 택시 아저씨를 만나 내 욕심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단체톡에 또 메시지를 보냈다. 야구장에 있던 나를 기어이 나오게 한 사브작이라고 말이다.
그날의 책은 'I May be Wrong'. 하지만 이날만큼은 난 틀리지 않았다. 야구장을 뒤로하고 온 선택은 참으로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