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책 같이 보기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공연장에 가는 길. 두 시간을 가야 하니 좀 두꺼운 책을 준비했다.
열차 안에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홍대로 출근하던 시절. 동인천역에서 출발해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코스. 운이 좋아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면 다른 사람이 들고 있는 책의 겉표지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책도 있군. 이 책은 표지가 예쁘네. 속으로 책 구경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신도림이었다.
자리를 못 잡고 서서 가는 날도 책구경은 가능하다. 사실 서서 갈 때는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진짜다.
이런 날도 있었다. 전철에 몸을 맡기고 손잡이와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는데, 엇. 앞에 있는 남자가 내가 읽고 있던 책을 읽고 있었다. 딱 내가 읽었던 그다음부터.
읽던 책이 눈앞에 있는데 눈길이 가는 건 당연지사.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고개를 뒤로 하고 뚫어져라 책을 노려봤다. 그런데 천생연분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읽는 속도도 나랑 비슷하다. 앗싸. 계속해서 같이(?) 읽다 보니 나름 호흡도 척척. 손님들이 타고 내릴 때는 살짝 뒤로 숨어있다가 다시 전철이 출발하면 슬쩍 다가가서 마저 책을 읽으며 신도림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책도 책이지만 그분이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발라드도 조그맣게 흘러나와 음악도 함께 들었었네. 매일이 오늘만 같아라는 마음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보다 늦게 내리려나? 딱 두 정거장만 더 가면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침침해진 눈도 다시 한번 깜박이고, 가방을 질끈 들어 내릴 준비를 했다. 신도림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문쪽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려는 그 순간. 그분이 책을 탁 덮는다. 그리고는 문을 나서며 나를 향해 책을 들고 웃었다.
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무슨 정신으로 사무실에 도착했을까. 다리가 후들후들하고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한동안 안장서 멍하니 모니터만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재미있게 책을 읽어놓고 그 책이 어떤 책이었는지는 절대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 마지막 순간에 모든 걸 들켜버려 머리가 하얗게 된 덕분일 것이다.
그 이후로 지하철에서 누군가 등 너머로 책을 보거나 옆에서 보는 느낌이 들면 함께 읽어도 된다는 시늉을 해주곤 한다. 혹시라도 주인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을 건넨다거나, 작가에 대한 의견을 물어올까 살짝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연을 보러 가던 날.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할머니는 졸고 계시고, 반대편에 앉은 젊은 청년은 겉표지를 흘깃 보더니 다시 허공을 봤다.
옛날 옛적 지하철에서는 서로의 책을 힐끔힐끔 훔쳐봤던 시절이 있긴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진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