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스는 엄마가 전공 숙제로 제출하려고 산 책이었다.
어릴 적 엄마에게 딥스는 참 특이한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말했더니 엄마는 소설이 아니라 실화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이를 낳고 지금 다시 읽어봐도 이 책이 기록물이라니 놀랍기만 하다. 한 아이와 수업을 하고 이렇게 책을 내기까지 딥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며 항상 안도했다. 그래서 어린애가 놀이치료책을 이렇게나 좋아하냐고 할 만큼 초등학교 시절 딥스를 끼고 살았나보다. 놀이치료니 아동심리가 뭔지도 모른 채 읽었지만 세상에는 아이들을 지켜주는 어른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항상 가장 먼저 펼쳐보던 장면이 있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딥스의 놀이 치료를 맡기로 결심했다'라고 써져 있는 부분이다. 바로 엑슬린 교수가 딥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치원 개별 심의회에 초청받은 후 선생님들에게 딥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놀이치료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는 장면이다.
딥스의 첫 장을 열기 전 항상 생각했다. 만약 이 선생님이 딥스를 맡기로 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이 책의 첫 장을 여는 일은 없었겠지. 책은 고사하고 딥스는 그럼 어떤 교육기관에 맡겨졌을지 혼자 고민을 했었다.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나는 대체로 의견이 분명하고 어떤 일을 선택할 때 고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자식을 키운다는 건 나를 건사하는 것과 다른 일이다. 내 선택이 아이의 일생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기에 항상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딥스에서는 그런 고민이 당연하다고 설명해 준다.
엑슬린 교수가 딥스와 놀이치료를 하기로 결정한 후 이런 말을 한다. 한 인간이 내면에 지난 성장 가능성의 지평은 다른 사람이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고 말이다.
유치원에서의 회의가 끝난 후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엑슬린 교수는 캄캄한 밤에는 흑과 백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이처럼 딥스 문제 역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것이다"라고 명백한 해답을 알려줄 만큼 밝은 빛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늘이 어둑해지면 판단도 결정도, 분노도 좀 더 관대하고 여유로워진다고 덧붙였다.
아이의 성장 가능성은 내가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함이 큰 영역이다. 그렇기에 딥스를 읽으며 그 영역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다시금 배우게 된다.
어린 시절 내가 딥스를 읽으며 마음이 안정되었던 이유는 이런 관대함이 책 전체에서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앞으로 딥스의 삶에 전부가 될지도 모를 선생님의 사랑이 나에게도 전달되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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